무소유(법정)

맑고 향기롭게 3.단순하고 간소한 삶-겨울 숲

qhrwk 2022. 6. 21. 20:22


♣겨울숲♣

겨울 바람에 잎과 열매를 훨훨 떨쳐 버리고 빈 가지만 남은 잡목숲,가랑잎을 밞으며 석양에 이런 숲길을 걸으면 

문득 나는 내 몫의 삶을 이끌고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가를 헤아리게 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그 세월을 제대로 살아왔는가를 돌이켜볼때 

나는 우울하다.

가랑잎 밞기가 조금은 조심스럽다.

아무롷게나 누워 있는 가랑잎 하나에도 준재의 의미가있을 것 같다.

우리가 넘어다 볼 수없는 그들만의 질서와 세계가 있을 법하다.

이세상 모든 것은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 때문에 거기 그렇게 존재한다.
지난가을. 말빚을 갚느라고 거의 산거를 비우다 싶이 하면서 여기저기 시정을 동분서주 했었다.

일을 마치고 산으로 돌아오자 그사이 잎이 물들었다가 벌써 낙엽이 지고 있었다.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밤바람 소리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내 속뜰이 되살아났다.

평화와 정적이 깃든 그 내면의 여로.산에서 듣는 바람소리는 귓전만을 스치는 것이 아니다. 

저 뼛속에 묻은 먼지까지도, 핏줄에 섞인 티끌까지도 맑게 씻어 주는것 같다. 

산바람소리는 갓 빗질을 하고 난 뜰처럼 우리들 마음속을 차분하고 정갈하게 가라않혀 준다.

인간의 도시에서 묻어 온 온갖 오염을 씻어준다.

아무런 잡념도 없는 무심을 열어 준다.

바람.눈에 보이지도,붙잡을 수도 없는 나그네. 보이지도 붙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히살아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생기를 돌게 한다.

이 세상에 만약 바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살아 있는 것은 시들시들 질식 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은 빛이 바래 재가 되고 말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을까.보이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보이는 것이 있게 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바탕으로 들리는 것이 있게 된다.

인도의 구루인 라즈리쉬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다.
"한 방울 물을 잘못 엎지를 때 우주 전체가 목마를 것이다. 한 송이 꽃을 꺽는다면 그것은 우주의 한 부분을 꺽는일,
한송이 꽃을 피운다면 그것은 수 많은 별을 반짝이게 함이어라.
아, 이 세상 모든 것은 이처럼 서로서로 밀접한 관계로 이루어졌느니,"


흔히 겪는 일인데, 산을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마루에 걸타 않아 앞산을 바라보기가 바쁘게

"왜 이렇게 조용하지요?"라든가
"너무 고요해 안 되겠는데요."라고 하면서 무엇에 쫒기듯 안절부절 불안해 하는 부류들이 있다. 

물론 그들은 도시에 사는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들, 말하자면 도시형 관념적인 지식인 들이다.
그들은 도시의 혼잡과 소음에잔뜩 중독된 나머지 원초적인 질서와 고요를 까맣게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순수하게 홀로 있는 시간을 받아들릴 수 없는 것이다.

무엇엔가 기대지 않으면 홀로 설 수가 없다.

그래서 자연 그대로의 고요를 감내 할수 없어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묻히도록,맑고 투명한 새소리가 무색하도록

트랜지스터를 틀어 대거나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가르켜 어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하게,이상야릇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다.

왜 오늘날 우리들은 '있음 '에만 의존 하는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형상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침묵이 없이 어찌 인간의 언어가 발음될 수 있단 말인가.

바다가 없이 어찌 육지만 둥그렇게 솟을 수 있을까
어느 하나 허墟를 배경 삼지 않은 실實은 존재 할 수 없다.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재상비상즉견여래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이나 형상은 모두가 하망한 것,

그러니 재상과 비상 즉 현상과 본질을 함께 볼수 있다면 비로서 우주의 실상을 바로 보게 될 거라는 뜻이다.

표현을 달리 한다면, 어떤 사물이나 형상을 바로 인식하려면 드러난 단면만 보지 말고 그 배후까지도 함께

꿰뚤어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불일암 둘레의 숲속에는 산토끼와 꿩들이 살고 있다. 

자기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나를 믿어서인지 나를 보고 놀라 달아나는 일이 없다.
눈이 많이 내려 쌓일 때는가끔 콩 같은 것을 뿌려 주는데, 그럴때는 가까이 다가와 마음놓고 주워 먹는다. 
이런걸 지켜보고 있으면 가슴에 훈훈한 물기가 도는 것 같다.

그러나 낮선 사람을 보고는 이내 달아나 버린다. 

어쩌다 마을 사람들이 올라와 뜰에서 어정거리는 꿩이나 토끼를 보면 반색을 한다. 

식탁의 요리감으로 잡아 먹을 궁리나 하지 짐승이 같은 생물인 사람을 믿고 다르는 이웃의 정은 기르려 하지 않는다.

순박한 짐승들은 이심전심의 묘리를 직감적으로 터득하고 있는 모양이다.

12월 초순인 요즘도 대숲머리에 있는 두 그루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강추위가 오기 까지는 얼마동안 더 달려 있을 것이다.
더러는 궝과 새들이 쪼아 반쯤 허물어 진것도 있지만 너머지는 멀쩡한 그대로다. 

벌써부터 보는 사람마다 왜 따지 않느냐고 입 맛을 다시곤 했지만 나는 과일을 입으로만 먹지 않고 눈으로도 

먹을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다.

실은. 내 뜰에 놀러온 새들에게 따로 대접할게 없으니 감이나 먹고 가라고 남겨 둔 것이지만, 나는 나대로 하루에도

몇차래씩 초겨울 하늘아래 빨갛게 매달려 있는 감을 바라보는 줄거움을 누리고 있으니 일거 양득이 아닐 수 없다.

앞산에 눈이라도 내려 하얗게 쌓이는 날, 빈 가지 끝에 매달린 감의 빛깔을 본 사람이면잘 알 것이다.

그 기막힌 빛의 조화를.


큰절 문수전에 살던 혜담스님은 한 해 겨울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신비로운 감의 빛깔을 보기 위해 비탈길을 미끌어져 

가면서 일부러 올라오곤 했었다.
겨울철 빛깔의 조화치고는 일품이 아닐수 없다. 입으로만 먹고 말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감맛을 볼수 있었겠는가.
예이츠의 시에선가,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더니 아름다움 또한 눈으로 드는 것일래라.

겨울숲은 부질없는 가식을 모조리 떨쳐 버리고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약된 나무들의 본래 모습이다. 

숲은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
침묵을 딛고 일어선다. 봄낭 움을 틔워 초록빛 물감을 풀어 수줍게 설레다가,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을 받아 서늘한 

그늘을 대지위에 드리운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익히면서 이골짝 저골짝에서 울긋 불긋 서로 손짓 하다가 마침내 미련없이 낙하. 머리와 

팔을 치켜든 채 이제는 말없이 묵상에 잠겨 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가 자신을 만들어 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은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리면서 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다가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