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3680

[산에는 꽃이 피네 ] (2) 홀로 있는 시간

홀로 있는 시간 우리처럼 한평생 산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산은 커다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 속이다. 산에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묻지 않은 자연의 숲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법정스님 수상집 중에서 얼마전 존경하는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님을 만났더니 이런 일화를 들려 주셨다. 그분이 한여름에 법정 스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불일암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는데 날은 덥고 주위에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그래서 이런 날은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무소유(법정) 2022.01.26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 까치는 자기의 목을 돌려서 자신을 보아도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면 배 부위의 흰색털이 보이므로 자신의 몸은 희다고 착각하며 까마귀를 검다고 비웃고 다닌다. 그래서 자신을 모르고 남의 흉을 보면서 떠벌이는 사람을 '까치 뱃바닥 같은 소리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나 결점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기에 까치처럼 남의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신을 알고 다스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은 잘난 체 하거나 뽐내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행동한다.

무소유(법정) 2022.01.25

[산에는 꽃이 피네 ] (1) 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엮으며 - 류시화

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엮으며 내가 처음 법정 스님을 뵙기 위해 송광사 뒷산 불일암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고요한 한낮,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지나 그곳에 도착하니 스님은 출타 중이고 안 계셨다. 나는 서너 시간을 주인 없는 불일암 뜰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차츰 어떤 평온함 같은 것이 내 안에 찾아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없는 빈터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료한 일이다. 나는 그냥 떠나갈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료함 대신 이상하게도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장소가 가진 어떤 분위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떤 집이나 방은 그 주인의 내면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집과 방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는가의 적나라한 드러남..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 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한 달 가까이 감기를 앓다가 쿨룩거리면서 이삿짐을 챙겼다. 7년 남짓 기대고 살던 오두막이지만 겨울철 지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영하 20동의 그 팽팽한 긴장감을 앓던 끝이라 몸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눈에 덮인 빙판길을 오르내리려면 목이 긴 털신에 아이젠을 걸고 다녀야 하는데, 이런 일도 이제는 번거롭게 여겨진다. 장작 패서 나르고 개울에서 얼음 깨고 물 긷는 일로 인해 내 왼쪽 엄지가 자꾸만 시큰거린다. 언젠가 아랫마을 김씨로부터 무슨 이야기 끝에 어디 바다 가까운 곳에 자기 친구가 살던 집이 있는데,그 집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무심히 흘려 듣고 말았는데 얼마 전 뒤늦게 그 말이 문득 떠올라 내 귀가 ..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 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이제는 늦더위도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득거린다. 풀벌레 소리가 여물어가고 밤으로는 별빛도 한층 영롱하다. 이 골짝 저 산봉우리에서 가을 기운이 번지고 있다. 요 며칠 새 눈에 띄게 숲에는 물기가 빠져나가고 있다. 어떤 가지는 벌써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초록의 자리에 갈색이 늘어간다. 나무들은 말이 없지만 기온이 더 내려가면 앓던 잎들을 미련없이 우수수 떨쳐 버릴 것이다. 이게 바로 계절의 질서요, 삶의 리듬이다. 철이 바뀔 때면 내 안에서도 꿈틀꿈틀 무슨 변화의 조짐이 생기는 것 같다. 허구한 날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그 범속한 일상성에서 뛰쳐나오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 가을에 나는 많은 것을 정리 정돈하고 있다. 오두막에서도 ..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 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그런 길은 없다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그런 길은 없다 장마가 오기 전에 서둘러 해야 할 일로 나는 요즘 바쁘다. 오두막 둘레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베고, 고추밭에 김도 매야 한다. 장마철에 지필 땔감도 비에 젖지 않도록 미리 추녀 밑에 들이고, 폭우가 내리더라도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여기저기 도랑을 친다. 산중에 살면 산마루에 떠도는 구름이나 바라보면서 한가롭게 지낼 것 같지만,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그렇듯이 일이 많다. 여럿이 할 일을 혼자서 해야 하는 경우에는 그 일이 끝이 없다. 산그늘이 내릴 무렵, 하루일을 마치고 개울물에 씻고 나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한참을 쉬었다.개울가에 앉아 무심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 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가난을 건너는 법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가난을 건너는 법 얼어붙은 산골에도 봄기운이 조금씩 번지고 있다. 응달과 골짜기는 아직도 얼어붙어 있지만, 한낮으로 비치는 햇살과 바람결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두어 자 높이로 지붕에 쌓여있던 눈이 녹아 내리는 낙숫물 소리에 문득 봄의 입김을 느낄 수 있다. 지난 겨울부터 산 아래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기름 보일러를 장작이나 연탄 보일러로 개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어려운 경제사정은 산촌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어제 장터에서 만난 김씨 보일러를 고치고 나니 기름값에 쫓기던 마음이 한결 놓인다고 하면서, 장작 타는 냄새에 옛 정취를 느끼게 되더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련은,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고갈되고 탕진된 민족의 에너지를 재..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 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거리의 스승들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거리의 스승들 오두막 둘레에는 5월 하순인 요즘에야 철쭉이 한창이다. 창호에 아련히 비쳐드는 분홍빛이 마치 밖에 꽃등이라도 밝혀 놓은 것 같다. 철쭉이 필 무렵이면 어김없이 검은 등 뻐꾸기가 찾아온다. 네 박자로 우는 그 새소리를 듣고 고랭지의 모란도 살며시 문을 연다. 야지에서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모란이 6월의 문턱에서 피기 시작한다. 그 빛깔이 어찌나 투명하고 여린지 가까이 다가서기가 조심스럽다. 어제는 산 너머 장에서 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고추와 가지와 오이와 케일, 방울토마토도 세 그루 심었다. 그리고 호박 모종을 여덟 구덩이 심고 남은 이랑에 고소씨도 뿌렸다. 며칠 동안 개울물을 길어다 목을 축여주면 모종들은 꼿꼿이 일어설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제..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 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나를 지켜보는 시선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나를 지켜보는 시선 며칠 전 문안을 드리기 위해 한 노스님을 찾아뵌 일이 있다. 한동안 뵙지 못해 안부가 궁금했고 의논드릴 일이 있어, 산중의 암자로 찾아갔었다. 그날은 눈발이 흩날리는 영하의 날씨였는데 노스님이 거처하는 방 안이 냉돌처럼 썰렁했다. 왜 방이 이렇게 차냐고 여쭈었더니 노스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요즘 세상에서는 한뎃잠 자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시주밥 먹고 사는 중이 어찌 방 안을 따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산중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땔감을 두고도 일부러 군불을 조금밖에 지피지 않아 썰렁한 방 안, 노숙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팔십 노인의 그 꿋꿋한 의지에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날 그처럼 썰렁했던 노스님의 방이 요즘의 내게는 화두처럼 가..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이 가을에는 행복해지고 싶네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이 가을에는 행복해지고 싶네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흐르고 바위는 서 있다. 꽃은 새소리에 피어나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친다. 온갖 자연은 이렇듯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공연히 소란스럽구나. 라는 옛책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자연은 저마다 있을 자리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분수 밖의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고 그들이 몸담아 사는 세상 또한 소란스럽다. 세상이 시끄럽다는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과 그들이 하는 일, 즉 인간사가 시끄럽다는 뜻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가을에는 좀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란다. 이런 말을 ..

무소유(법정)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