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3675

오두막 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인간의 가슴을 잃지 않는다면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인간의 가슴을 잃지 않는다면 추석을 앞두고 연일 음산한 날씨 때문에 풀을 쑤어 놓고도 미처창문을 바르지 못했다. 가을날 새로 창을 바르면 창호에 비쳐드는 맑은 햇살로 방 안이 아늑하고 달빛도 한결 푸근하다. 이제 산중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서 날마다 군불을 지펴야 한다. 들녘에 풍년이 들면 산중에는 흉년이 든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올해는 다행히 비바람이 순조로워 가을 들녘마다 이삭과 열매가 풍성하게 여물었다. 그러나 산중에는 가을 열매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오두막 뒤곁에 있는 예닐곱 그루의 산자두나무에 열매가 전혀 열리지 않았다. 해마다 주렁주렁 열리던 세 그루의 해묵은 돌배나무에도 올 가을에는 열매가 달리지 않았다. 오미자의 빨간 열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산 너..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개울물에 벼루를 씻다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개울물에 벼루를 씻다 비가 내리다가 맑게 갠 날, 개울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벼루를 씻었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면서 벼루를 씻고 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문득 내 안에서 은은한 묵향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듯 말게 흐르는 개울물도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면 흙탕물로 온통 폭포를 이루어, 골짜기가 떠나갈 듯이 소란스럽다. 이런 날은 자연의 일부분인 내 마음도 스산해져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밤에는 넘치는 물소리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같은 산중에 사는 나무와 짐승과 새들도 그런 내 기분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기 때문이다. 인적이 끊긴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나..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가난한 절이 그립다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가난한 절이 그립다 옛 스승은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반드시 그 뜻을 잃는다. 예전의 출가 수행자는 한 벌 가사와 한 벌 바리때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려고 하지 않았다. 사는 집에 집착하지 않고, 옷이나 음식에도 생각을 두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오로지 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런 법문을 대할 때마다 나는 몹시 부끄럽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생각 일으켜 살던 집에서 뛰쳐나와 입산 출가할 때는 빈손으로 온다.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빈손으로 오듯이, 이 절 저 절로 옮겨 다니면서 이런 일 저런 일에 관계하다 보니 걸리는 것도 많고 지닌 것도 많게..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어느 오두막에서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어느 오두막에서 올 봄에는 일이 있어 세 차례나 남쪽을 다녀왔다. 봄은 남쪽에서 꽃으로 피어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매화가 그 좋은 향기를 나누어주더니 산수유와 진달래와 유채꽃이 눈부시게 봄기운을 내뿜고, 뒤이어 살구꽃과 복사꽃, 벚꽃이 흐드러지게 봄을 잔치하고 있다. 메마른 가지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다니, 그 꽃에서 고운 빛깔이 생겨나고 은은한 향기가 들려오다니,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살아 있는 생명의 신비는 그대로가 우주의 조화다. 이 우주의 조화에는 가난도 부도 없다, 모든 것이 그 때를 알아, 있을 자리에 있을 뿐이다. 꽃은 무심히 피고 소리 없이 진다. 이웃을 시새우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꽃에 비하면 그 삶의 모..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섬진 윗 마을의 매화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섬진 윗마을의 매화 며칠 전 내린 비로, 봄비답지 않게 줄기차게 내린 비로겨우내 얼어붙었던 골짜기 얼음이 절반쯤 풀렸다. 다시 살아난 개울물 소리와 폭포소리로 밤으로는 잠을 설친다. 엊그제는 낮에 내리던 비가 밤 동안 눈으로 바뀌어 아침에 문을 열자 온 산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어 볼 만했다. 말끔히 치워 두었던 난로에 다시 장작불을 지펴야 했다. 옛사람들이 건강 비결로, 속옷은 늦게 입고 늦게 벗으라고 한 그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날씨가 좀 춥다고 해서 곧바로 두터운 속옷을 껴입으면 한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 데에 저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햇살이 좀 따뜻해졌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앞을 다투어 봄소식을 전하는 방..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수선 다섯 뿌리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수선 다섯 뿌리 눈 속에 묻혀서 지내다가 엊그제 불일암을 다녀왔다. 남쪽에 갔더니 어느새 매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남지춘신南枝春信이라는 말이 있는데,매화는 봄에 햇볕을 많이 받는 남쪽 가지에서부터 꽃을 피운다고 해서 이런 말이 생긴 것 같다. 남쪽 가지에 봄소식이 깃들여 있다니 그럴듯한 표현이다. 기왕에 심어 놓은 매화인데 생육 상태가 안 좋아 재작년 가을에 자리를 옮기고 거름을 듬뿍 주었더니 활기를 되찾아 올해에는 꽃망울이 많이 맺혀 있었다. 나무뿐 아니라 사람도 있을 자리에 있지 않으면 자신이 지닌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시들고 만다. 이번에 불일암 내려가면서 수선 다섯 뿌리를 가지고 가 돌담 아래 심어 주었다. 이 일을 마치고 나니 숙제를..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비닐 봉지 속의 꽃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비닐 봉지 속의 꽃 11월 한 달을 히말라야에 가서 지내다 왔다. 해발 2천에서 2천 5백 고지에 있는 가난한 산동네이다. 8년 만에 다시 찾아간 네팔과 인도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은 그들의 생활이 도리어 믿음직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어 가는 세상에서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했다. 우리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생활수준으로 비교한다면, 그들은 너무도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근로자의 하루 노임이 우리 돈으로 남자는 2천 원도 안 된다. 여자는 그 절반이다. 그쪽에서 중산층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는 집세까지 포함해서 13∼4만 원 수준이다. 이런 생활조건 아래서 살아가면서도 그들의 눈..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안으로 귀 기울이기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안으로 귀 기울이기 옛글인 에 이런 표현이 있다. 시냇물 소리는 한밤중이요. 산빛은 해질녘이라 泉聲中夜後 山色夕陽時 시냇물 소리는 한밤중의 것이 그윽해서 들을 만하고, 산빛은 해질녘이 되어야 볼 만하다는 뜻이다. 낮 동안은 이일 저일에 파묻히느라고 건성으로 지내다가, 둘레가 고요한 한밤중이 되면 산중에서 들리는 거라고는 오로지 시냇물 소리뿐이다. 시냇물을 따라 어디론지 흘러가고, 지극히 편하고 그윽한 마음이 꽃향기처럼 배어 나온다. 해질녘 가라앉은 빛에 비낀 산색에는 생동감이 있다. 그 굴곡과 능선이며 겹겹이 싸인 산자락까지 낱낱이 드러나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산은 바라볼 만하다. 마음을 열고 무심히 석양의 산색에 눈길을 보내고 있으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쁘게 살아..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편지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두 자루 촛불 아래서

3. 안으로 귀 기울이기 - 두 자루 촛불 아래서 며칠 전부터 연일 눈이 내린다. 장마철에 날마다 비가 내리듯 그렇게 눈이 내린다. 한밤 중 천지는 숨을 죽인듯 고요한데 창밖에서는 사분사분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앞산에서 우지직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잠시 메아리를 이룬다. 소복소복 내려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생나무 가지가 찢겨 나가는 것이다. 어제 밖에 나갈 예정이었지만 길이 막혀 나가지 못했다. 고속도로와 국도는 제설작업으로 어지간하면 길이 뚫리는데 지방도로와 산골짜기는 눈이 녹아야 길이 열린다. 지금까지 내려 쌓인 눈도 무릎께를 넘는데 며칠 더 내리면 허벅다리까지 빠질 것이다. 한겨울 깊은 산중에서는 행동반경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마루방에 있는 난로에 불을..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2.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 - 마른 나뭇단 처럼 가벼웠던 몸

2.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 - 마른 나뭇단처럼 가벼웠던 몸 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나와 출세간出世間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돌아 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머니의 품속에서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듣고 어머니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무소유(법정) 202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