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3685

오두막 편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바람 부는 세상에서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바람 부는 세상에서 지난 밤 이 산골짜기에는 거센 바람이 불어댔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도록 바람이 휘몰아쳤다. 아침에 일어나 나가보니 여기저기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창문을 가렸던 비닐이 갈기갈기 뜯겨 나가 있었다. 그리고 아궁이에 재를 쳐내는 데 쓰는 들통도 개울가에 굴러가 있었다. 대단한 바람이었다. 내일 모레가 우수雨水인데 사나운 바람이 부는 걸 보면, 겨울이 봄한테 자리를 내주고 물러갈 날도 머지 않았나 보다. 바람은 왜 부는가.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기압의 변화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인 바람은 움직임으로써 살아 있는 기능을 한다. 움직임이 없으면 그건 바람일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이 어디 바람 뿐이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청정한 승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청정한 승가 며칠 전 남쪽을 행각하다가 지리산 자락의 한 객사客舍에서 하룻밤 쉬는데, 때마침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밤새 내리는 봄비 소리를 들으면서 메마른 내 속뜰을 적셨다. 나는 무슨 인연으로 출가 수행자가 되어 이 산중에서 한밤중 비 내리는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하는 생각에 이르자 '출가 수행자'란 말이 대문자로 이마에 박혔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그때도 겨울철 안거를 마치고 남쪽을 행각하다가 한 암자의 선방에서 잠시 쉬어 온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선방의 인상이 하도 좋아서 지금까지도 내 기억의 바다에는 맑게 간직되어 있다. 두어 평 될까말까한 조그만 방인데, 방안에는 방석 한 장과 가사 장삼, 그리고 시렁 위에 작은 걸망이 하나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12월이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이르렀다. 지나온 날들이 새삼스레 되돌아보이는 마루턱에 올라선 것이다. 마르틴 부버가 하시다즘(유태교 신비주의)에 따른 에서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이 글을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치지 말고, 나직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을 향해 소리내어 읽어 보라.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이 물음을 통해서, 우리는 각자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12월이다. 금년 한 해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자기 관리

1. 너는 네세상 어디에 있는가 - 자기 관리 가을이 짙어간다.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개울가에는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다. 성급한 나뭇잎들은 서릿바람에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나는 올 가을에 하려고 예정했던 일들을 미룬 채 이 가을을 무료히 보내고 있다. 무장공비 침투로 영동지방 일대는 어디라 할 것 없이 긴장되어 뒤숭숭하다. '열 사람이 지켜도 한 도둑을 못 막는다'는 옛말이 새롭게 들리는 요즘의 시국이다. 내 거처는 작전지역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그래도 같은 영동지방이라 긴장된 분위기를 나누어 갖지 않을 수 없다. 길목마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군인과 경찰들이 검문검색을 하는 바람에 될 수 있는 한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다. 오고 가는 길에 혹시라도 내 '비트'가 노출될까봐 나는 각별히 신경을 쓴다...

무소유(법정) 2022.01.19

오두막 편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뜰에 해바라기가 피었네 자다가 깨어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다가 이내 털고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일어날 시간이 되지 않았더라도 일단 깨어났으면 더 뭉갤 필요가 없다. 눈이 떠졌는데도 잠자리에서 뭉그적거리면 게으른 버릇밖에 길러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다음 고히 잠들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 살만큼 살다가 신체적인 동작이 멎었을 때, 친지들이 검은 의식을 치르면서 '고히 잠드소서' 어쩌고 하면서 작별의 인사를 할 것이다. 그때 가면 평생에 모자라던 잠을 온몸이 다 삭아질 때까지 실컷 잘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깨어있는 맑은 정신으로 보다 유용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기상나팔'은 이만 불고, 오늘 마음에 고인 말을 풀어놓으려고 한다..

무소유(법정) 2022.01.18

오두막 편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시간 밖에서 살다 삼복 더위에 별고 없는가. 더위에 지치지 않았는가. 더위를 원망하지 말라. 무더운 여름이 있기 때문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그 가을바람 속에서 이삭이 여물고 과일에 단맛이 든다. 이런 계절의 순환이 없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제대로 삶을 누릴 수가 없다. 그러니 날씨가 무덥다고 짜증낼 일이 아니다. 한반도와 같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는지역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커다란 복이라 할 수 있다. 7월 한 달을 나는 바깥 출입 없이 이 산중에만 눌러 앉아 지냈다.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자연의 흐름을 따르면서 새롭게 살아보고자 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 집회의 약속을 이행 못하게 된 연유로 해서 모..

무소유(법정) 2022.01.17

오두막 편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인디언 '구르는 천둥'의 말 여기저기서 꽃이 피고 잎이 열린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귀에 익은 새소리들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난다. 자연의 질서, 순환의 흐름은 이렇듯 어김없다. 먼지와 소음과 온갖 공해로 뒤덮인 번잡한 길거리에서, 그래도 철을 어기지 않고 꽃과 잎을 펼쳐 보이는 나무들을 보면 반갑고 기특하면서도 안스럽기 그지없다. 누가 피어나라고 재촉한 것도 아니지만 때가 되니 스스로 살아있는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 생명의 신비다. 대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그 모진 추위 속에서도 얼어죽지 않고 살아있다. 겉으로 보면 깊은 잠에라도 빠져 있는 것 같지만, 뿌리와 줄기는 그 침묵 속에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을 한다. 흙을 의지해 서서 햇볕을 받아들이고..

무소유(법정) 2022.01.17

오두막 편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1.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 흙방을 만들며 올 봄에 흙방을 하나 만들었다. 지난해 가을 도자기를 빚는 이당거사利堂居士의 호의로 흙벽돌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가 산골에 얼음이 풀리자 실어왔다. 4월 꼬박 방 한 칸 만드는 일에 골몰했다. 산 아래 20리 밖에 사는 성실한 일꾼 두 사람과 함께 일을 했다. 이전까지 나뭇광으로 쓰던 자리에다 방을 들였는데, 이번에는 아궁이를 기존의 방향과는 정반대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 만든 방의 위치도 위치지만 어떤 바람에도 방 하나만은 군불을 지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는 이곳에 와 살면서 거센 바람 때문에 군불을 지피는데 너무 애를 먹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에 겪어 온 경험과 두뇌회전이빠른 일꾼의 솜씨로 이번에 만든 방은 불이 제대로 들인다. 나는 당..

무소유(법정) 2022.01.17

숲 속의 이야기

숲 속의 이야기 아침부터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내나무들이 고개를 드리우고, 간밤에 핀 달맞이꽃도 후줄근하게 젖어 있다. 이런 날은 극성스런 쇠찌르레기(새)도 울지 않고, 꾀꼬리며 밀화부리.뻐꾸기.산까치. 불새.휘파람새 소리도 뜸하다. 어제 해질녘, 비가 올 것 같아 장작과 잎나무를 좀 들였더니 내 몸도 뻐근하다. 오늘이 산중 절에서는 삭발 목욕날. 아랫절에 내려가 더운 물에 목욕을 하고 왔으면 싶은데, 내려갔다 올라오면 길섶의 이슬에 옷이 젖을 것이고 또 땀을 흘려야 할 걸 생각하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솥에 물을 데워 우물가 욕실에서 끼얹고 말까보다. 숲속에서 살다보면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기분도 상쾌하여 사는 일 자체가 즐겁지만, 비가 오거나 바람이 거세게 부..

무소유(법정) 2022.01.17

오두막에 들어와 살면서

오두막에 들어와 살면서 내가 이 오두막에 들어와 살면서 겪은 일들을 이제와 낱낱이 되돌아보면, 그 때 그 때 내 자신을 형성하는 데에 어떤 받침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진정한 수행이 무엇인지를 몸소 겪으면서 자신을 다스려온 것이다. 안으로 살피는 일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을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오두막 살림살이의 밝은 면만을 알렸기 때문에 내 거처를 마치 무릉도원처럼 여기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은 도시건 산중이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그런 곳에서는 그런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몸담아 사는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라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디서나 참고 견뎌야 할 일들이 있다. 내가 볼일로 ..

무소유(법정) 2022.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