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믿음이 으뜸가는 재산

qhrwk 2022. 2. 5. 08:46

 

 

믿음이 으뜸가는 재산

 

 

이 세상에서는 믿음이 으뜸가는 재산이다 덕행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오고
진실이야말로 맛 중의 맛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거룩하신 스승(부처님)께서는 알라비 나라에 있는 알라바카 야차夜叉의 처소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알라바카 야차가 밖에서 돌아오더니 스승을 보고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주시오.""좋다, 친구여."스승은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사문이여, 들어오시오.""좋다, 친구여."

스승은 들어가셨다.

또다시 알라바카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주시오.""좋다, 친구여."스승은 다시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사문이여, 들어오시오.""좋다, 친구여."

스승은 또 들어가셨다.

세 번째 또 알라바카 야차는 스승에게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주시오.""좋다, 친구여."스승은 다시 나가셨다.

또다시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들어오시오.""좋다, 친구여."스승은 들어가셨다.

네 번째 또 알라바카 야차는 말했다.

"사문이여, 나가주시오."그러자 이번에는 스승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더 나가지 않겠다.   네 할 일이나 해라."

야차가 말했다.

 

"사문이여.제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제게 대답을 못한다면당신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당신의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붙잡아

갠지스 강 건너로 내던지겠소."

스승은 대답하셨다.

"친구여,신. 악마. 브라흐만을 포함한 세계에서그리고 사문, 바라문, 신, 인간을 망라한 것 중에서

내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내 심장을 찢고 두 다리를 붙잡아갠지스 강 건너로 내던질 만한

그런 자를나는 아직 보지 못했노라.

친구여,그대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거든무엇이든지 물어보라."

알라바카 아챠는 다음의 시로써 말을 걸었다.

 

"이 세상에서사람에게 음뜸가는 재산은 무엇입니까어떠한 선행善行이 안락을 가져옵니까

참으로 맛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을최상의 생활이라고 합니까?"

 

스승은 대답하셨다.

"이 세상에서는믿음(信仰)이 으뜸가는 재산이다덕행德行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오고

진실이야말로 맛 중의 맛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다."

 

"사람은 무엇으로(생사의 )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무엇으로 바다를 건너며무엇으로 고통을 극복합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완전히 청정해집니까?"

"사람은 신앙의 힘으로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다정진으로 바다를 건너며근면으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지혜로써 완전히 청정해진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 지혜를 얻습니까어떻게 해서 재물을 얻고어떻게 해서 명성을 떨치며

어떻게 해서 친교를 맺습니까또 어떻게 하면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을 때걱정이 없겠습니까?"

 

"성자들이 열반을 얻는 이치를 믿고부지런히 정진하고 총명하다면가르침을 들으려는 열망에 의해서

지혜를 얻는다.적절하게 일을 하고참을성 있게 노력하는 이는 재물을 얻는다성실을 다하면 명성을 떨치고

무엇인가를 중으로써 친교를 맺는다.

 

깊은 신앙을 가지고 집에서 사는 사람(在家)에게성실과 자제와 견고와 보시이 네 가지 덕이 있으면

그는 내세에 가서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성실과 자제와 보시와 인내보다 더 나은 덕이 있다면 그것을 널리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물어보라."

 

야차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다시 사문이나 바라문에게널리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저는 오늘내세에 이익 되는

 일을 깨달았습니다.아, 깨달으신 분께서 알라비에 살러오신 것은저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저는 보시를 하면어째서 커다란 과보를 얻을 수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시골도시에서 도시로 돌아다니겠습니다 깨달으신 분과 진리의 뛰어남에 예배 드리면서."

 

 

★강론

 

  믿음과 자기 확신을 가지라

 

가을이 가고 겨울이 내리고 있다어느새 한 해가 또 지낙 버린다.우리에게 허락된 세월의 한 자락이

 이렇게 소멸되어간다.월동 준비가 끝나고 나면 덧문을 닫고 이제는 안으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새봄을 마련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밖으로 떠돌던 여로의 향向을 바꾸 내면으로 돌아설 것이다.

의타와 의존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의 독립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거듭 실험하면서 안으로

 다지게 될 것이다.

 

이래서 겨울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는 고마운 계절이기도 하다.안으로 거두어 들임이 없다면

여물지 않는다.  여물지 않은 빈 꺼풀을 가리켜 우리는 굳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의타와 의존이, 정신의 독립성을 지니려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해독이 되는가를,나는 최근의 몇몇 경험을

 통해 투철하게 확인한 바 있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갖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은, 인간을 형성해 나가는끝없는 여로에서 볼 때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야차와 부처님 사이에 주고받은 되풀이되는 문답, 즉"나가주시오." "들어오시오.""좋다, 친구여."

 이런 장면을 대하면서 우리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 서너 차례씩이나 오고 가는지.   세 번까지는 끈기있게 야차가 시키는 대로

 따르던 부처님도 네 번째에 가서는 "나는 더 나가지 않겠으니 네 할 일이나 해라." 하며 단호히 거절한다.

 

우리 같으면 이런 경우 두 번도 참아내기 어려울 것이다.세번씩이나 묵묵히 따라주는 부처님의

 인내력 또한 대단하다.한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 견디는 그 인내와 덕행에서 우리는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이며, 어떤 선행이 안락을 가져오고, 맛 중의 맛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냐고 묻는 야차의 질문은 우리들의 의문을 대변해준다.  

 이물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대로 지혜의 말씀이다.

 

믿음信仰이  으뜸가는 재산이라는 것.   호화로운 저택이나 승용차, 부동산이나 증권 같은 것이 으뜸가는

 재산이 아니라, '믿음' 이 으뜸가는 재산이라는 말은 자칫 관념적으로 들리기 쉽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볼 때 인생을 살아가면서 믿음과 자기 확신이 없다면 그 어떤 소중한

 재산이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삶의 가치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덕행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온다고 했다.  

덕행이란 타인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확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남에게 덕을 입히는 일이 선행이지만, 어떤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덕행은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물질이건 마음이건 무엇인가를 이웃과 나누어 가질 때 그 일이 곧 덕행이 되고 서로가 안락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적인 경험이다.

그러니 우리가 순간순간 살아가는 일에서 안락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삶이고.안락 대신

 불만과 불안이 따른다면 그것은 아무에게도 덕행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삶의태도는 곧바로

 고쳐야 한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 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할 가르침이다.

진실이 맛 중의 맛이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 될 거라는 가르침 또한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삶의 교훈이다.   잇따라 내놓은 알라바카 야차의 적절한 질문은 우리에게야차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시켜 준다.   여기에서 야차는 악독한 귀신이기보다는 끝없는 선善을추구하는 선신처럼 느껴진다.

 

이와 같이 스승(부처님)의 가르침은, 신앙으로써 생사의 격류를 건널 수 있고, 한결같은 꾸준한 노력(정진)으로 생사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우리 앞에놓인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지혜로써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한 청정은 곧 해탈과 열반을 뜻한다.  

번뇌의 속박과 갈등에서 벗어나려면 오로지 지혜에 의지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제기된 신앙과 정진과 근면과 지혜는 우리들 삶의 알맹이가 되어야 할 것들이다.  

과연 지금의 나에게 그와 같은 신앙과 정진과 근면과 지혜가 갖추어져 있는지 어떤지,

경전을 대하는 이는 다 같이 돌이켜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경전에 나오는 이런 문제 제기를 통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왜냐하면 경전을 읽는 태도가 곧 삶의 의미와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알라바카 야차의 물음은 집요하다. 그것은 곧 참을 캐내려는 구도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서 지혜를 얻고 재물을 얻으며, 또 어떻게 해서 명성을 떨치고 친교를 맺으며,저 세상에 가서도

 걱정이 없겠느냐는 물음.

 

이에 대한 스승의 답은 우리가 마음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만큼 아주 요긴한 내용이다.

일찍이 많은 성자들이 열반의 경지에 이른 그 도리를 확신하고 정진을 계속한다면, 바로 그런 열의에

의해서 지혜의 눈이 열린다고 했다.   우리에게 그런 확신과 열의가 있는지 어떤지 묻고 살펴야 한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추어 알맞게 일을 하고 참을성 있게 꾸준히 노력하면 구누가 재물을 얻을 수 있고,

성실을 다하면 그 이름이 드러나며,무엇인가를 나누어 줌으로써 친구가 된다는 가르침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진리란 엉뚱한 데 있지 않고 보편 타당한 우리 일상 속에 있음을 거듭 확인한다.

 

재가 신자들에게 성실과 자제와 견고와 보시, 이 네 가지 덕이 있으면 그는 그 다음 세상에서도 걱정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네 가지 덕 가운데 '자제'는원문에 '진리'로 되어 있는 것을 필자가

 '자제'로 고쳤다.  

그렇게 한 까닭은 바로 다음 구절에는 '진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자제'로 나와 있으며, 또 네 가지 덕으로

볼 때 진리보다는 자제 쪽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남방의 경전 용어인 팔리어로 진리는dhamma이고,

 자제는 dama이다.   기록상 혼동할 수 있는 비슷한 용어다.

 

또 여기에서 말하는 네가지 덕 가운데 하나인 '견고'는 불퇴전의 의지이며 끝없는 인내이기도 하다.

어쨌든 성실과 자제와 보시와 인내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추어야 할 덕임에는 틀림없다.

성실성은 이웃에게 신뢰감을 주고, 자제력은자신의 건전한 질서를 유지시켜 주며, 보시는 이웃과의

관계를 심화시켜 주고,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야 할 인내력은 삶의 의지력이기도 하다.

 

한 해가 기울어가고 있는 이때 우리는 이 평범한 교훈을 통해, 우리들 생애의 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덕을 쌓았으며 어떤 관계를 이루어왔는지 한번쯤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침잠의 계절인 이 겨울에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스려가야 할 것인지도 함께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지의 봄은 계절의 질서를 따라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의 봄은 인간 스스로의노력 없이는 찾아오지도 피어나지도 않는다. 

이 겨울에 다가올 새봄을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