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가 참 경전
인간의 이 육신은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므로꽃이나 향으로 감추어져 있다
이런 몸뚱이를 지니고 있으면서잘난 체 뻐기거나 남을 깔본다면
그는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걷거나 서면또는 앉고 눕거나몸을 구부리고 또는 편다 이것이 신체의 동작이다
이 몸은 뼈와 힘줄로 연결되어 있고내피內皮와 살과 살갗으로 덮여 있어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다.
이 몸의 내부는 장과 위와 간장, 방광, 심장, 폐장, 신장, 비장으로 가득 차 있다.
콧물, 점액, 진물, 지방, 피,관절액, 담즙, 기름 등이 있다.
또 이 몸의 하홉 구멍에서는 끊임없이 오물이 흘러나온다 눈에서는 눈고귀에서는 귀지.
*아홉 구멍은 양쪽 눈, 양쪽 귀, 양쪽 콧구명, 입, 항문, 생식기를 가리킨다.
코에서는 콧물입에서는 침을 흘리고 가래를 뱉는다그리고 온몸에서는 땀과 때를 배설한다.
또 그 머리의 빈 곳[空洞]에 이끌려서이런 육신을 깨끗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 죽어서 몸이 쓰러졌을 때는 부어서 검푸르게 되고 묘지에 버려져 친척도 그것을 돌보지 않는다.
개나 여우, 늑대, 벌레들이 파먹고 까마귀는 독수리 같은 날짐승이 쪼아먹는다.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수행자는 깨달은 사람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분명히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저 죽은 시체도 얼마 전까지는살아 있는 내 몸뚱이와 같은 것이었다
살아 있는 이몸도언젠가는 죽은 저 시체처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알고 안팎으로몸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세상에서 애욕을 떠난 지혜로운 수행자는 죽지 않고 평안하고 멸하지 않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인간의 이 육신은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므로 꽃이나 향으로 감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오물로 가득 차서 여기저기서 그것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몸뚱이를 지니고 있으면서잘난 체 뻐기거나 남을 깔본다면그는 눈면 소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강론
육신의 한계와 실상을 잊지 말라.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 음악보다 훨씬 마음을 즐겁고
순하게 다스려준다. 흙과 나무들은 말이 없어도 생기에 차있다.발가벗은 나목의 숲에 안개가 서리니
뻑뻑해진 내 가슴에도 물기가 배어드는 것 같다.
한겨울에 내리는 비는 강추위 속에 흩날리는 눈보라보다 우리마음을 한결 부드럽고 촉촉하게 적셔준다.
이러다가는 어디선가 매화와 동백이 꽃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다.
초기 불교가 분석적이라는 말은 그 전에도 지적한 바가 있다. 불타 석가모니는 세계와 인생에
대해투철한 관찰로써 있는 그대로를 보았고, 치밀한 분석으로써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했다.
여기에서는 우리들 육식에 대해서 해부학적인 분석과 관찰을 시도하고 있다.
뼈와 힘줄로 얽어서 살갗으로 포장된 육신의 실상을 낱낱이 해체해 비정하게 펼쳐보이고 있다.
이런 분석과 해체의 의도는, 이 육신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애착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데 있다.
친지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 가끔 묘지나 화장터에 따라가는 수가 있다.
평소 고인의 삶의 자취를 되새기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어디까지나 '관객'의 입장에서 한다.
그러나 단순한 조문이나 관객의 관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은 친구의 차례지만, 이 다음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차례임을 알아야 한다.
친지의 죽음은 곧 우리들 자신의 한 부분의 죽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들 차례에 대한 예행 연습이며,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이다.
삶은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이지만 죽음만은 틀림없는 인생의 매듭이기 때문에 더 엄숙할 수밖에 없다.
삶에는 한두 차례의 시행착오도 용납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에는 그럴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잘 죽는 일은 바로 잘 사는 일에 직결되어 있다.
초기 교단의 수행자들이 이 육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기 위해 부정관不淨觀을 닦은 것도,이런 경전을
통해서 그 실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육신을 굳이 부정不淨한 것으로만 생각하려는 태도도
육신에 대한 또 하나의 집착일 수 있다. 살갗 속에 그와 같은 오물투성이인 이 육신을 갖고도 아름답고
어질고 착한 마음씨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이 몸 또한 빛과 향기를 발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 몸은 한편 악기와 같아서, 좋은 가락을 연주하면 아름답게 울리고, 추한 가락을 퉁기면 추하게 울리게
마련이다.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소극적인 삶의 태도와 적극적인 삶의 양식에 따라 인생은 얼마든지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 소극적인 삶보다는 적극적인 삶을통해서 더욱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인간 사회를
구축해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 육신의 한계 와 실상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 이런 되돌아봄이 없으면 인생이 자칫
오만해지거나 넘치기 쉽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필가이며 사상가인 랄프 W. 트라인이 쓴 <나에게서 구하라, 내 안의 무한한 지혜와 생명을 찾아> (류시화 번역)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혼의 방에 많은 창을 달아라우주의 광명이 두루 비치도록
좁은 생각의 문구멍으로는저 한량없는 빛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눈면 과념 유희 다 내던지고하늘처럼 높고 진리처럼 드넓은
그 맑은 창으로 빛이 넘치게 하라.
그대의 귀를저 소리 없는 별들의 음악에 태초의 소리에 열어놓고
그대의 심장을꽃이 해를 보고 얼굴을 마주하듯
진리 쪽으로 고동치게 하라.
보이지 않는 천 개의 손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평화의 바다로그대를 데려가리라
수천만의 눈들이 환한 빛을 보내리라.
지적인 자만이 편견에 사로잡혀, 또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진리가 들어오는 문을 막아놓는 사람에게
진리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에게 진리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언제 어디에서 다가올지 모른 진리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사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법칙에 의해서 진리가 사방에서 다가온다는 것이다.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이나 흩어져 있는 돌멩이 하나가 그에게 진리를 노래해주고. 어디서나 그는 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고 했다.
랄프 트라인은 에머슨. 소로우. 휘트먼 등과 함께 동양적인 근본 회귀根本回歸 사상에 뿌리를둔 세계관으로 서양 문화의 새로운 방향을 찾고 있다.
같은 책에서 그는 지네에 대한 애야기를 흥미있게 펼쳐보인다. "한 마리 지네가 백 개나 되는 다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백 개나 되는 다리로 걸어가는 것은(사실은 기어가는 것이지만 ) 하나의 기적이다. 두 개의 다리를 조절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백 개나되는 수많은 다리를 조절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네는 언제 어디서나잘 조절해 왔다.
이런 지네를 지켜보던 한 마리 여우가 의문에 사로잡힌다. 여우라는 짐승은 항상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다. 우화 속에 등장하는 여우는 물론 일종의 상징이다. 지식과 분석과 논리의 상징. 여우는
보고관찰하고 분석한다. 그런 다음 자기가 터득한 지식을 전파한다.
여우는 지네가 백 개의 다리를 가지고도 아무 탈 없이 잘 걷는 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네에게 다가가서 묻는다.
"예, 잠깐. 의문나는 점이 있다. 너는 어떻게 그 많은 발들을 조절하니? 한 발 다음에 어느 발이 뒤
따라야 하는지를 어떻게 다 알고 있니? 백 개의 발이라니, 그 많은 발을 가지고도 너는 아주
유연하게 걷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과연 어떻게 이런 조화가 일어날 수 있니?"
지네가 대답한다.
"나는 평생을 두고 이렇게 그저 걸어다닐 뿐이야. 그러나 한번도 네가 묻는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내게 시간을 주면, 그 점에 대해서 한번 차분히 생각해볼게."
지네는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지네는 처음으로 분리되었다.
관찰자로서의 마음과 관찰되는 자로서의 그 자신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지네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지닌 능력에따라 언제나 살고, 걷고, 또 그렇게
되풀이해 왔다. 다리를 움직이는 자신과 다리가 둘이 아니었다.그의 삶은 전체로서 하나였다.
그런데 여우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자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지네는 다시는 자연스럽게 걸을 수가 없었다. 이때 여우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네가 걷는 게 무척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왔어. 나는 그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지네는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
"전에는 결코 어렵지 않았어, 그런데 여우 네가 문제르 일으킨거야. 이제 나는 다시 그전처럼 걸을 수가
없게 되었어."
지식이란 이와 같이 위험한 것이라고 우화는 넌지시 일깨워준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우처럼
의심이 많고 분별이 많으며 따지기 좋아하는 인물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트라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목사건 신부건 승려건 또는 철학자건 간에, 이 우주의 무한한 진리를 표현하고 미화하고 전파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세 치혀로써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충동질해 진리를 깨달은 스승이라고
숭배받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참된 스승은 결코 다른 사람을위해서 진리를 해석 해주지 않는다. 참된 스승은 제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온 힘을 다해서 도울 뿐이다. 제자 내부의 본질이 그대로 꽃피어나 자기 스스로
깨닫도록 정열을 다 쏟는다.
많은 사람들은 순전히 자기 욕심이나 며예를 위해 또는 개인적인 동기에 사로잡혀 서로
돋보이려고 애쓴다. 또 자신이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체하거나 깨달았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형편없는 바보가 아니면 사기꾼이다."
남의 스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살아 있는 말씀을 깊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남의 스승 되기가 어디 쉬운 노릇인가 자식이나 지혜는 그마두고라도 인가적으로 불성실하거나 미숙한사람이 남을 가르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서로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경전을 읽는 것은 지식이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우의 분별과 따짐을
넘어서서,하루 세 끼 밥을 먹듯이 영혼의 양식을 먹는 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지네처럼 백 개의 다리를가지고도, 즉 이 풍진 세상의 온갖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무심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 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경전의 글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경전이 어디 종이나 활자로 된 책뿐이겠는가.
삶 그 자체가참 경전 아닌가. 읽도 또 읽고 음미하면서 인생을 더욱 곱고 향기롭게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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