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유능하고 정직하고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만족할 줄을 알고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도 간소하게 하며모든 감관이 안정되고
총명하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며남의 집에 가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들에게서비난을 살 만한 비열한 행동을결코 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어떠한 생물일지라도겁에 떨거나 강하고 굳세거나그리고 긴 것이건 큰 것이건 중간치건 짧고
가는 것이건 또는 조잡하고 거대한 것이건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거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어느 누구도 남을 속여서는 안 된다또 어디서나 남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남을 곯려줄 생각으로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
또한 온 세계에 대해서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 적의가 없는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신성한 경지라 부른다.
*신성한 경지를 범주梵住라고 한다.
온갖 사특한 소견에 팔리지 말고,계행戒行을 지키고 지견知見을 갖추어
모든 욕망에 대한 탐착을 버린 사람은결코 다시는 모태母胎에 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모태에 드는 일이 없다는 것은 생사에 윤회가 없다는 말.
★강론
작은 것을 갖고도 만족하라
<숫타니파타>에 수록된 중에서도 이 '자비'의 장은 아주 짧은 경전이다.
분량은 짧지만, 본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안한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 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일상적인 우리들도 삶의 의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사람다운 일이란 이웃을 살아하는 일일것이다.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종교적인 이론은 메마르고 팍팍하기 그지없다.
살아서 움직이는 활동과 행위야말로 생기 있는 삶의 본질을 이룬다.
요 며칠 동안 34,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산중이 이럴 때 사람들이 많이 어울려 사는 도시는 훨씬 더 무더울 것이다.
이런 날은 좌선도 독서도 또는 글 쓰는 일도 따분하다.
능률이 오르지 않을 뿐더러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는 것은 사는 일이 될 수가 없다.
어제는 헛간에서 판자쪽을 꺼내어 톱으로 썰고 대패로 밀고 망치로 못을 박아 다락에 놓고 쓸
받침대를 하나 만들었다.
급한 성미라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그자리에서 일을 해치워야 직성이 풀린다.
미루면 그것이 마음 한 구석에서 곰팡이를 피워 다른 일에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생각했던 일을 마치고 나야 또 다른 일로 옮길 수 있다.
한 자락 깔아두고 다른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헛간에 세워두었던 판자가, 아무 표정도 없이 하나의 재료에 지나지 않던 그 판자가,
사람의 생각과 손길이 닿자 새로운 생명을 얻어 쓰임새 있는 하나의 구조물이 된 것이다.
또닥또닥 일에 열중하느라고 한낮의 더위도 잊어버렸다.일을 끝내고 그 받침대 위에 물건을
올려놓았을 때의 흐뭇한 기쁨은 이 무더위 속에서 얻기 힘든 상쾌함이었다.
우물가에 내려가 샘물을 끼얹고 나니 마음과 몸이 날 듯이 가벼워졌다.
오늘 해질녘에는 새로 꽃향기를 풍기기 시작한 치자나무와 채소밭에 샘물을 길어 뿌려주었다.
시들시들하던 꽃나무와 채소들이 생기를 되찾으니, 나 또한 생기와 잔잔한 기쁨이 배어 나왔다.
관계의 이웃이란 이와 같이 생기를 나누어 가짐이다.
G.아궤예스의 <생명을 주는 사랑>이라는 소책자 속에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함께 있는 두 사람 사이를 가장 멀리 느끼게 하는 것은 사랑의 결핍이다.
떨어져 있는 두 사람 사이를 가장 가깝게 느끼게 하는 것은 사랑의 유대다.
옳은 말이다. 한 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고 늘 치대면서 함께 산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서로가 10만 8천 리다. 아주 먼 거리를 가리키는 불교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그 고장의 말씨며 날씨에까지 마음을
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의 그늘이다.
우리 속담에 "마음이 천 리면 지척도 천 리요,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다." 라는 말은
이런 소식을 대변해준다.
어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있느냐 아니냐는, 그가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느냐의 여부에 달렸다.
건성으로 사랑하는 체하거나 또는 까닭없이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불행하다.
물론 까닭이 있어 미워하겠지만, 어쨌든 미워하는 일은 잘못 사는 일이고 불행한 일이다.
그 책 속의 사연은 계속된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헤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사랑 자체가 이미 확신이므로 헤아릴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누어 갖는 것이므로 반드시 넘쳐흘러야 합니다.
그리고넘쳐흐르는 것은 헤아릴 수도, 헤아릴 필요도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본시 넘쳐 흐르는
것이므로 그렇습니다.사랑을 헤아리려는 사람들은 참으로 살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랑은 줄수록 넉넉해지는 마음이다. 주어도 주어도 더 못 주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여기 받으려는 생각이 끼여들면 그것은 이미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예언자>에서 지적한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사랑은 자기 자신 밖에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고,
자기 자신에게서밖에 아무것도 뺏는 것이 없다.사랑은 소유하지도 않고 누구의 소유가 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떻더냐 둥글더냐 모나더냐
길더냐 짧더냐 자로 잴 수 있겠더냐
얼마나 긴지는 몰라도 애끊는 듯하더라.
날씨가 무더운 바람에 객소리가 길어졌다. 그러면 다시경전으로 돌아가보자.
주석서에 따르면, 부처님은 이 '자비'를 호주護呪(보호해 주는 주문)로서도 설했다고 한다.
우리는 '주문'이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이 중얼중얼 외우는 다라니나
진언 같은 것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주문이 진실한 말[眞言]이라면, 그 뜻부터 충분히 이해하고 외워 실천해야 한다.
아무 뜻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외우기만 하면 공덕이 된다고 하지만, 굳이 공덕을 따지기로 말하면,
뜻을 모르고 건성으로 외우기보다는 뜻을 알고 그 뜻을 생각하면서 외우는 편이 훨씬 공덕이 되어야 한다.
불타 석가모니의 이성적인 가르침에 비밀은 없다고 부처님 자신이 분명히 선언한 바 있다.
다라니나 진언에 어째서 뜻이 없단 말인가. 뜻 없는 소리를 무엇 때문에경전에 수록했겠는가.
원어를 깨쳐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진실한 말씀'의 뜻을 엉뚱하게 잘못 받아들인 데서온 오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이런 자비의 선언이야말로
'진실한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독교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인간 본위다.
그래서 소나 개, 돼지, 노루나 사슴, 토끼 같은 짐승은 모두 사람들에게 잡아 먹히라고 하나님이
만들어냇다고 한다. 소나 개한테 가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것도 없이 유목사회에서 나옴직한 가설이다. 그러나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자비는 인간 본위가 아니라 생명 본위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一切衆生]은 생명의 큰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샘영을 해치거나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만일 산 목숨을 해치거나
괴롭히면 큰 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보살계의 첫째는 불살생不殺生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제가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수단을 써서 죽이거나 칭찬을 해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을 외워 죽여서는 안 된다.
즉, 죽이는 인因(직접원인)과 죽이는 연緣(간접 요인)과 죽이는 방법과 죽이는 업業으로 목숨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보살은 항상 자비스런 마음과 공손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도리어 방자한 생각과 통쾌한 마음으로산 목숨을 죽인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불살생계를 두고 이처럼 상세히 규제하는 가르침을 우리는 일찍이 어디에서도 본 바가 없다.
그만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계戒는 타율적인 또는 강제적인 규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규범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삶의 질서다.
그 질서가 무너질 때 자기 삶의 규범에 균열이 생긴다.
산 목숨을 죽이지 않을 뿐더러 한 걸음 나아가 보살피고 사랑하라는 것.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벗는 자비심을 내라."
고 했다.그리고 또 "온 세계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를 행하라. 위아래로 또는 옆으로 장애와
원한과적의가 없는 자비를 행하라."고 했다.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를 행하라고 한 것은, 좋은 말만 늘어 놓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한낱 경전의 표현으로 여기고 지나치지 말라는 뜻이다. 소리내어 읽으면서 순간순간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자비의 생활 규범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하루 하루 사는 일이 새롭게 펼쳐질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비로 대할 수 있다면, 내 자신의 삶이 곧 자비로 충만해질 것이다.
"서 있는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런 생활 태도를 가리켜 숭고한 경지 또는 신성한 경지라고 부른다.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조그마한 것을 갖고도 거기서 넉넉함을 알고, 불필요한 것들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 될 수 있는 한 비본질적인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간소하고 담백하게 한다.
보고 듣고 하는 감관이 안정되어 마음이 항상 평온해 흐트러지이 없다.
그리고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집 세간살이나 가재도구를 보고도 절대로 부러워하거나 탐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은 이미 자비로 가득 채워져 있어, 더 채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세간적인 갈등이나 미혹이 없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이 경전은 끝을 맺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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