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종류의 수행자
의혹을 넘어서고고뇌를 떠난 열반을 즐기며 탐욕을 버리고
신들을 포함한 세계를 이끄는 사람이런 사람을 '도의 승리자'라고
눈을 뜬 사람들은 말한다.
탐내지 말고 속이지 말며대장장이네 아들 춘다가 말했다.
"위대한 지혜로운 성인 눈을 뜬 어른 진리의 주인 애착을 떠난 분
인류의 최상인最上人 뛰어난 마부께 저는 묻겠습니다
세상에는 어떤 수행자들이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스승(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춘다여 네 종류의 수행자가 있고 다섯 번째는 없느니라
지금 그 물음에 대답하겠다
'도의 승리자''도를 말하는 사람' '도에 의해 사는 사람'
그리고 '도를 더럽히는 자'아니라."
대장장이 춘다는 말했다.
"눈을 뜬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켜 '도의 승리자'라고 브르십니까
'도를 말하는 사람'은 어째서 다른 사람과 견줄 수 없으며
'도에 의해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십시오
그리고 '도를 더럽히는 자'에 대해서도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의혹을 넘어서고 고뇌를 떠나 열반을 즐기며 탐욕을 버리고
신神들을 포함한 세계를 이끄는 사람 이런 사람을 '도의 승리자'라고
눈을 뜬 사람들은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을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알고
법을 설하고 판별하는 사람 의혹을 버리고 흔들리지 않는 성인을
수행자들 중에서 둘째로 '도를 말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잘 설명한 진리의 말씀인 도에 의지해 살면서 스스로 억제하고
깊이 생각해서 잘못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수행자들 중에서
셋째로 '도에 의해 사는 사람'이라 부른다.
맹세한 계율을 잘 지키는 체하지만 고집 세고 가문을 더럽히며
오만하고 남을 속이며 자제력이 없고 말 많고그러면서도 잘난 체 뻐기는
사람을 가리켜'도를 더럽히는 자'라고 한다.
학식이 있고 총명한 재가在家 신도는'그들 네 종류의 수행자는 다 이와 같다'고 알아
그들을 통찰하여 그와 같이 보더라도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더럽혀진 것과 더럽혀지지 않은 것 청정한 이와 청정하지 않은 자를
혼동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강론
눈을 떠야 볼 수 있는 열린 세상
춘다는 한문으로 순타淳陀, 준타准陀, 주나周那등으로 음역되어있다.
그는 부처님께 최후로 공양을 올린 사람으로, 불타 전기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여기서는 그 상황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지만. 팔리어 본<대열반경>과 부처님의 생애를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는 <장아함경長阿含經>안에 든 <유행경游行經>에는 그 상황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부처님이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파바에 있는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가 소유한 망고나무
숲에 머물게 된다. 이때 춘다는 부처님을 뵙고 다음날 부처님과 수행승들을 공양에초대하는데,
이 공양 끝에 네 종류의 사문(수행승)에 대한 법문을 했던 것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춘다의 집안은 대대로 대장장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대장장이네 아들 춘다'로 불린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금속 세공을 직업으로 삼은 것.
춘다가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을 공양에 초대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인도의 계급사회에서는 대장장이나 금속 세공인은 천업賤業으로 여겼다.이런 그의 초대를
부처님은 선뜻 받아들였다. 어느 때는 유녀遊女 암라팔리의 초대에 응하기도 했다.여기에서 우리는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역사적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그 당시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면서도 사회적으로는 멸시 받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신적
지도자를찾게 되고, 불타 석가모니의 행동은 그 당시 계급의 두터운 벽을 헐어버리려는
의지에 차 있었다.
그래서 계급 타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장도 나온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날 때부터 귀한 사람(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오로지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천한 사람도 될 수도 있고 귀한 사람도 될 수 있다."
<유행경>에 보면, 춘다의 집에서 공양을 할 때 대중 가운데 나이 많은 한 스님이 있었는데,그는 뒤늦게
출가한 늦깎이였다. 그가 대식가여서 그랬던지 아니면 식탐食貪 때문이었던지,그는 자기 몫 이외에
다른 그릇에다 먹음직한 음식을 더 받았다. 이를 보고 공양이 끝난 뒤 춘다가 부처님께, 세상에는
어떤 종류의 수행자들이 있는지 말씀해 달라고 법문을 청했던 것이다.
2,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오늘날 우리 현실의 수행승을 두고 볼 때. 그 종류의 다양함에
우리는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도 별의별 사람들이 많듯이, 먹물옷 입고 머리 깎고 중
행세하는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허구한 날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의 지하도에서 목탁을 치며 탁발 아닌 구걸을
일삼는 무리들이 더러 있다. 어떤 종파의 승려인지, 옷만 빌어 입은 사기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밖에서 보면 먹물옷 입고 머리를 깎았으니 똑같은 '스님'으로 보일 것이다.
절에 몸을 담고 있어도 공동생활의 질서를 무시한 채 세속의 업을 익히면서 돈 버는 일에만 골몰하는
그런 중들도 얼마든지 있다.
부처님의 출가 제자들도 행세, 시주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부처님의 더화는 고사하고 도리어 부처님께
욕을 보이는 그런 승려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류들을 가리켜 '도를 더럽히는 자'라고
경전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말세'라는 말을 쓴다. 말세의식은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나 예수님 당시에도 없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그릇된 가치의식에 사잡혀 인륜으로나 도덕적으로 큰 혼란을 가져왔을 때,
악독한 지배 세력이 죄 없는 백성들을 괴롭혀 사는 일이 몹시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때, 불의가 정의를
유린 할 때를 가리켜 말세니 말법시대니 하는 말을 썼다.
우리가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오늘이 과연 말세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말세의식은 언제 어디서나 있게 마련이지만, 선거 유세장에 살벌한 폭력이 난무하고, 주장이나 뜻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한밤중에 거리낌 없이 파괴와 살육을 하는 이런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은 절대로 아니다.
정치가 무엇이고 국회의원이 무엇이기에 세상이 이토록 시끄럽고 갈가리 찢기고 흩어지게
되었는지알 수가 없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무엇엔가 혹해서 미쳐
날뛰고 있는 것만 같다.
예전에 비해 우리의 살림살이가 물질적으로는 많이 나아지고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사람 값은,그리고
그 꼴은 말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할 때 번듯한 집과 호화로운가구와 편리한 가전제품들인들
어떻게 빛을 발할 수 있겠는가.그것은 단지 물건의 더미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떠야 한다. 내가 내 눈을 떠서 세상을
내 눈으로볼 수 있어야 한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남의 장단에 춤을 추지 않는다.
온갖 의혹을 극복하고 세속적인 고뇌를 떠나 열반(안온, 평안)을 즐기는 사람을 '도의
승리자'라고 한다. 또 자기 분수 밖의 탐욕을 버리고 신들까지도 포함해서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을 '도의 승리자'라고 한 것.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금속 세공인 춘다의 물음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대답하면서도
"눈뜬 사람들은 말한다."고 한 표현이다. 불교란 어떤 특정인의 가르침이 아니고 '눈뜬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아니고 눈을 뜨면누구나 본래적인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 당시 인도 사회에는 많은 사문(수행자)들이 있어 저마다 자기의 주장을 내세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육파 찰학이다. 춘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직업상 여러 계층의 사문들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수행자가 진짜고 사이비인지 때로는
혼란이 일어났을 법도 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어떤 수행자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는 것이다.
대중 앞에서 의례적으로 설법이나 강연을 한다고 해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인가를 알아서 진리를 말하고,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을 가릴 줄 아는 사람, 확고한 신념으로 그 어떤 주앚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대중 앞에 나서서 말하기가 날이 갈수록 조심스럽고 어렵게 느껴진다.
할 말도 없지만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어쩌다 말을 쏟아버리고 나면 내 속은 텅 빈 항아리처럼
허전하기 짝이 없다.내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말로만 떠벌리는 일이 싫다. 아주 싫다.
글을 쓰는 일도 그렇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일어났던 광적인 지역 감정과
비이성적인대립의식을 곰곰이 생각할 수록 내 자신을 포함해서 한국인의 인성人性에
대해 새삼스럽게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대권을 잡겠다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동조자나 추종자 또는
유권자들이진정으로 이나라와 겨례를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지역의 인사라 해서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자기네 주장과는 다르다고 해서 원수를 대하듯 맞서서 으르렁거리던 한심스런 현실 앞에 말과 글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내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한국인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를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파당과 분열과 증오와 어리석음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가 경전을통해 눈뜬 성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지식을 위해서도 아니고
지혜를 위해서도 아니다.오로지 일찍이 눈을 뜬 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내 자신의
눈을 뜨기 위해서다.
우리들 각 개인은 커다란 우주 생명의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다.
뿌리 없이 가지만 존재할수 있는가. 뿌리가 있기 때문에 동쪽으로 서쪽으로 또는 남쪽으로
북쪽으로 가지가 펼쳐진다.또한 그 가지의 생기를 통해서 뿌리는 더욱 굳게 뻗어 나간다.
그러니 가지끼리 미워하고 다툴 때 뿌리인들 성할 수 있겠는가.
'도에 의해 사는 사람'이란 부처님 법을 팔아서 사는 사람이아니다.
진리를 말이나 글로써가 아니라 몸소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 삶 자체가 진리일 때, 그는 도에 의해 사는 사람일수 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그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는다.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고, 아무근거도 없이 떠도는 말에 좌우되지 않는다.
엉터리나 사이비에 속지 않을 뿐더러 진짜를 대했을지라도 거기에 얽매이거나
현혹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눈을 맑히고 자기 눈으로 보고 판단한다.
"그는 더럽혀진 것과 더럽혀지지 않은 것,
청정한 청정하지 않은 자를 혼동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눈을 뜨자.
멀쩡한 내 본래의 눈이 있는데 어째서 남의 눈에만 의존하려고 하는가.
중의 종류가 많건 적건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양식을 지닌 총명한 신앙인은 비본질적인 일에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삶과 이웃과의 관계를 거듭거듭 더 낫게 고쳐가면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세상을 사는지, 인생의 최고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 때때로
헤아려 보아야 한다.
눈을 뜨자.
아니, 누가 내 눈을 감겼단 말인가.
사물을 내 스스로 보지 못하고 남의 눈으로 보아온 그릇된 버릇에서 벗어나면 된다.
활짝 열린 눈에는 한 티끌도 가릴 수 없다.
내 눈이 열려야 열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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