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김 못생김
저는 제가 너무 못생겼다고 느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저를
쳐다보는 게 별로 재미없을 거라고 혼자 최면을 거는 것 같습니다.
마음은 늘 불필요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문제들을 일으키는 게 바로 마음의 기능이다.
그리고 마음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대는 거기에 사로잡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 문제가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그저 바라보라.
그 문제의 부조리를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뭔가를 하기 시작하면,
그대는 그 문제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 문제가 지닌 불합리성을 깊게 관찰해보라.
모든 얼굴은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얼굴은 서로 다르게 아름답다.
모든 얼굴은 개별적이고 독창적이다. 사실 비교란 있을 수 없으며,
어떤 비교도 불가능하다.
이 점을 수용한다면, 그대는 아름다워질 것이다.
수용을 통해서 아름다움이 생긴다.
자신을 거부하고 거절하면 불구가 되고 추해질 것이다.
그리고 악순환이 된다.
처음부터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대는 추해진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그 추함을 느낄 것이고, 그대는 ‘좋아, 맞다.
내가 생각한 게 맞아.’라고 말하며 더욱 거부한다. 마음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충족시킨다.
그대가 첫 번째 단계를 놓치면 마음의 모든 예언들이 들어맞게 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란 그대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기준 같은 것은 없다.
사실 거의 5천 년 동안 철학자들은 미의 개념을 규정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기준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실패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비해 아름다우면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도 누군가에게는 끔찍할 수 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다.
따라서 기준은 없다. 그리고 그 기준은 패션처럼 늘 변한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는 여자의 가슴과 힙이 별로 크지 않으면 아름답다고 보지 않는다.
이제 서양에서는 힙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가슴 역시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
미에 대한 다른 개념이 생기고 있다.
그 개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육체는 그것을 충족시킨다.
이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가슴이 큰 여자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국가에서는 여자들이
큰 가슴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소설, 시, 문학이 사회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소설, 시 문학이 사회를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품은 관념들이 생기면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다.
사실 그것은 변덕스러운 사람의 기호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선 그대를 아무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다.
그대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그대의 개념을 반대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에게 온갖 방식으로 그를 방해하고 곤경에 빠뜨린다.
누군가 그대와 사랑에 빠지면, 그대는 그 사랑을 파괴할 것이다.
그대는 ‘당신은 어떻게 추악한 마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혹은 이 사람이 미에 대한 매우 재미있는 개념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대를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우선 모두가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를 말한다.
“신을 사랑하라.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
그것이 기본이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은 그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 대해 행복하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은 분명히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하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미를 창조한다.
그녀 자신이 우아하고 귀한 사람이 된다.
- 오쇼의 <바디 마인드 밸런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