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말씀

[마음으로 읽는 부처님 말씀] 이모의 장례를 치루는 부처님

qhrwk 2024. 8. 21. 08:20

 



[마음으로 읽는 부처님 말씀] 이모의 장례를 치루는 부처님

부처님이 베살리의 보회강당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베살리의 고대사(高臺寺)에는 이모 대애도(大愛道=마하파자파티) 비구니가 다른 

비구니들과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들은 ‘이 안거가 끝나면 부처님은 쿠시나가라로 가시는데 아무래도 곧 열반에 

드실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대애도 비구니는 이 말을 듣고 부처님을 찾아와 한 가지 청을 올렸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비구니가 비구니를 위해 계를 설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십시오. 앞으로는 비구니가 비구니를 위해 설계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다만 

여래가 전에 설계한 것처럼 하여 틀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설계(說戒) 허락을 받은 대애도 비구니는 부처님을 하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저도 다시 여래의 얼굴을 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애도 비구니는 처소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반에 들었다. 

이에 앞서 함께 수행하던 다른 여러 비구니들도 먼저 열반에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처님은 아난다를 시켜 장례를 준비시켰다.

 

 아난다는 야수제(耶輸提)라는 대장을 찾아가 장례에 필요한 평상과 기름과 꽃과 향과 

수레를 부탁했다. 

야수제는 부처님의 지시로 이미 열반에 든 다른 비구니들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가 시신을 거두려고 문을 열자 옆에 있던 두 명의 사미니가

 ‘스승님들을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했다. 

야수제가 ‘그대의 스승님들은 이미 열반에 들었다’고 하자 두 사미니도 곧 열반에 들었다. 

야수제는 이들의 시신도 수습해서 공양했다.  

대애도 비구니의 시신은 부처님이 직접 수습했다. 

대애도 비구니의 시신은 아난다와 난다와 라훌라에 의해 평상에 모셔졌다. 

이어서 부처님도 몸소 평상의 한쪽 다리를 들고 교외의 화장터로 향하였다. 

제자들이 민망히 여겨 대신하려고 했으나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두라.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젖을 먹이고 안아주고 길러준 은혜는 매우 크다. 

그 은혜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  

화장장에 도착한 부처님은 앞서 열반한 비구니들과 사미니의 시신을 공양한 뒤 

화장토록 했다. 

이어서 대애도 비구니 몸 위에도 꽃과 향을 뿌리고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일체의 현상은 덧없는 것, 한번 나면 반드시 다함이 있네. 태어나지 않으면 죽지 않나니 

이 열반이 가장 큰 즐거움이네.(一切行無常 生者必有盡 不生則不死 此滅爲最樂)”
 
게송이 끝난 뒤에는 찬다나 섶나무에 불을 붙여 화장을 했다. 

화장이 끝나자 사람들은 대애도 비구니와 다른 비구니들을 사리를 거두어서 탑을 

세우고 공양했다.
증일아함 50권 대애도열반품(大愛道涅槃品) 제1경  

 

사람들은 불교가 속가의 부모나 처자 권속과의 인연을 끊으라고 가르치는 줄로만 안다. 

출가라는 행위가 세속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효(孝)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이런 점을 근거로 불교를 무부무군지교(無父無君之敎)

라며 배척하려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그러나 이 경전에서 보듯이 부처님은 세속의 인연을 무조건 단절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부처님은 이모이자 양모인 대애도 비구니가 열반하자 손수 상여를 메고 장례를 치른다.

아버지인 정반왕이 승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반왕열반경>에 의하면 부처님은 이복동생인 난타와 함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부모의 은혜를 생각해서 손수 상여를 메고 가서 화장을 했다.

부처님이 끊으라고 한 것은 세속적 욕망과 집착이지 은혜까지 모른 척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불자라면 누구나 하늘같고 높고 바다같이 깊은 부모님의 은혜를 불효로 갚는 일은 없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 출처 : 불교신문 : http://www.buddhist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