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기도와 수행의 이해2.

qhrwk 2024. 11. 10. 08:11

 

 

기도와 수행의 이해2.

♣양자물리학에서 본 기도와 가피♣

양자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양자수프(quantum soup)라고 설명하는데, 즉 우주는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의 양자수프의 상태로 있다가 인간의 

의식과 의도가 일어나는 순간 그 무한한 가능성 중에 하나를 현실로 만들어낸다고 한다. 

양자수프는 불교의 공성(空性)과도 같이, 텅 비어 있지만 그 속에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이 

갖추어져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양자수프는 우리가 원력을 세워 기도를 올림으로써 

그 원력에 의식을 집중할 때 그 원력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자물리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가피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가피력은 때때로 기적적인 치유를 가능하게도 하는데, 이를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도약이라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하나의 우주에서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존재하다가 때때로 다른 

가능성으로 양자도약을 한다고 한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세계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괴로워하고 

살다가 기도를 통해 불보살의 가피, 즉 양자도약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세계로 갑자기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양자물리학에서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도약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신비한 연결성 때문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입자들이 서로 분리되어 소통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양자물리학에서는 

입자들이 아무리 먼 거리에 있다고 할지라도(초공간성, 비국소성) 서로 연결된 것처럼 행동하는 

신비로운 연결성, 연기성을 발견했고, 이를 양자 얽힘이라고 부른다. 

파동은 곧 입자와 다르지 않은데, 우리가 기도할 대 기도하는 정신적인 파동이 초공간성으로 

연결된 이 우주법계 곳곳에까지 연결되어 힘이 미치게 되고, 비슷한 파동으로 진동하는 

것들을 끌어당겨 공명의 법칙으로 서로 감응하게 함으로써 기도가 이루어지는 물질현실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에너지 파동이 초공간성으로 우주 끝까지 연결되고 

전파되어서 그 파동에 공명하는 입자들을 서로 신비롭게 연결시킴으로써 양자얽힘을 통해 

기도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원력이 담긴 기도♣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원력을 세워 기도해야 한다는데 있다. 

원력과 소원은 서로 다르다. 

소원은 아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소망이지만 원력은 아상을 

넘어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타적 서원이다. 

개인적인 소원은 자신 개인의 복력을 가져다 쓰는 것이지만 이타적인 발원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 우주법계의 무량대복과 불보살님의 무한한 

가피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타적인 원력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면, 곧 나부터 먼저 잘 될 수밖에 없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상대를 위한 기도는 곧 나를 위한 기도가 된다.
이런 원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도와 수행은 서로 다르지 않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수행의 목적 또한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고에서 벗어남으로써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가 그 근원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간절한 기도의 함정♣

중생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성취하며 살아나가는 존재다. 

자기다운 삶을 통해 이 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이 세상에 자기다운

방식으로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나온 목적이다. 

그렇기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도 또한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문제가 된다. 과도한 집착은 곧 좋은 쪽으로 

달리 말하면 간절한 기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도가 너무 과도하게 간절해지면 오히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기도하는 이의 마음은 원력을 내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절대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원력에는 집착이 붙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선호’와도 같다. 

과도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선호이기 때문에 원력에 힘이 붙는 것이다. 집착을 한다는 것은 

곧 거기에 ‘나’가 붙는다는 말이고, 그러한 아집은 이타적 원력이 아니다. 그렇기에 집착을 

한다는 것은 이타적 원력이 아닌 이기적인 소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집착하면 오히려 거꾸로 이루어지기 쉽다. 집착하는 마음 이면에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불안과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게 되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이루어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마음 속에 연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집착하는 대신 순수하게 원할 수 있어야 한다. 

‘과도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선호’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기도를 

할 때는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불보살님께서 내려주는 것은 내 생각을 넘어서는 

더 크고 깊은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라는 대수용의 마음이 바탕 되어야 한다.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은 것이다. 

다만 마음을 내어 선호하는 방향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할 뿐, 결과는 모두 

불보살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생각에 좋은 것과 불보살님의 지혜에서 정말 좋은 것은 다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주법계에서는 

지금 당장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해도 더 깊은 차원에서 또 다른 더 큰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참된 기도인의 자세는 원력을 세워 기도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집착과 아상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닌, 기도성취를 통해 이 세상에 

기여하고, 중생을 구제할 수 있으며, 나다운 삶의 길을 찾아감으로써 깨달아가는

 마음공부의 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