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수행의 이해 3.
♣기도할 때의 주의점♣
보통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는 중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염원하고 되뇌이곤 한다. 원하는 바를 부처님께 고하여 말씀드려야지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할 때는 처음과 끝에 발원문을 한번씩 읽을 수는 있겠지만,
기도 중간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기도 할 때는 염불이든, 주력이든, 다라니든, 절이든 그 기도수행에만 집중해야 한다.
원력을 이루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모든 생각들이 내려 놓아진 텅 빈 내면의 깊은 공간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근원의 텅빈 공의 자리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가능성, 즉 일체유심조의 현실창조의 힘은 생각이 많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들이 놓여지고 순수한 원력만이 있을 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도와 수행의 연결점♣
이런 점에서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다르지 않다.
다만 수행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온전히 충분하고 완전함을
깨달으면서 오로지 그 순간에 바라는 것 없이 현존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그 순간에 깨어있는
기도를 하지만,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 개입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기도는 타력이며 기복이고 하근기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 같고, 수행은
자력이며 상근기 수행자들이 행하는 수준 높은 것처럼 느끼는 분별심 또한 내려놓아야
할 것임이 드러난다.
올바른 기도는 곧 수행과 연결되기 때문에, 바르게 기도를 하는 이는 곧 그것이 하나의 방편
수행이 되는 것이다.사실 기도가 가장 잘 될 때는, 수행을 통해 온갖 번뇌 망상과 욕망이
내려놓아 진 때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무수한 생각들이 잦아들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비로소 우리의 본연의 텅 빈 무한
가능성의 공간이 열린다.
그렇게 고요해진 마음에서 한 생각 일으켜 순수하게 바라는 기도의 원력을 일으킨다면 그 기도는
힘을 받는다. 무수한 생각과 번뇌들 속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하는 바 그 한 가지에만 집중이 되지
않고 힘이 분산되지만, 수행을 통해 텅 빈 그 고요한 마음 위에 바라는 바를 일으켜 기도를 한다면
바로 그 한 가지에 모든 힘이 집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수행과 기도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그래서 수행자는 따로 기도를
하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한 생각’ 일으켜 무엇이든 쉽게 만들어내고,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늘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그 고요한 가운데 일어난 한 생각에는 고도로 집중된 창조적 에너지가
모이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와 수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듯 하지만,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연결된다.
그러나 처음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수행하라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중생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힐링해주며, 원하는 바를
들어 주는 기도의 신행 방식은 중생의 눈높이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의 관점에서는 매우
뛰어난 방편의 신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대기설법이며, 응병여약의 방편설법인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이타적인 원력을 세우며, 내면의 본래청정성을 일깨우다
보면 저절로 보다 깊은 깨달음의 세계와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그 때 수행이라는 불교 본연의 공부가 보다 깊이 와 닿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가♣
수행은 왜 하는 것일까?
단순하다.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에서 괴로움은 일상생활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 일상의 소소한
괴로움이라면, 수행에서의 괴로움은 생노병사 등 인간의 근원적 괴로움들을 포괄한다.
부처님께서는 근원적 괴로움에서 벗어나 참된 열반을 얻을 수 있음을 설하시며 바로 그 고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도성제를 설하셨다.
그 도성제가 바로 ‘수행’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곧 연기, 무아, 자비에 있으며 이를 깨닫기 위한 실천 수행법이 바로
도성제요 도성제가 바로 중도다. 중도를 세부적으로 구현한 것이 팔정도이고,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바로 사념처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가 바로 ‘수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중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 없고 분별없는 행이다.
양 극단의 판단이나 분별들은 곧 집착을 가져오고, 실체화시킨다. 그렇게 집착하고 애쓴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실체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실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아와 연기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은 곧 무분별과 무집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팔정도의 핵심 수행법인 정념이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사념처다.
조금 더 쉽게 단순화하면 중도, 팔정도, 사념처라는 수행은 한 마디로 ‘분별없는 관찰’을 의미한다.
그러나 막연하게 분별없이 관찰하라고 하면 잘 집중이 안 된다.
어느 한 가지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모아 집중(止)’함으로써 분별없는 관찰(觀)은 더욱 쉽게
이루어진다. 부처님께서는 그 집중적 관찰대상을 사념처 즉 ‘신수심법’이라는 네 가지에 두셨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그 집중하는 대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우리가 흔히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즉 절, 염불, 간경, 진언 다라니,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등 그 모든 수행법들 또한 사실은 ‘분별없는 관찰’의 대상에 따른 수행법이며, 중도와
팔정도,사념처에 이르는 길이다.
예를 들어 염불수행은 그 집중과 관찰의 대상이 부처님 명호인 것이다.
염불을 하면서 온갖 생각과 판단, 분별들은 내려놓고 분별없이 염불하는 소리를 관찰하거나,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지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염불수행이다.
마찬가지로 절이나 간경, 진언, 다라니, 호흡관, 간화선 등도 근본에서는 마찬가지다.
절을 하면서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분별을 쉬고 절하는 몸의 동작에 집중하여 관찰하고, 간경이나
진언, 다라니를 외우면서 외우고 있는 것을 분별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온갖 번뇌, 망상과 생각을 그치고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수행을 지(止)라고 하고,
분별없는 관찰을 관(觀)이라고 하여, 지관겸수, 혹은 정혜쌍수라는 수행법이 나온 것이다.
이처럼 불교 수행은 부처님 명호나 진언, 다라니, 호흡, 화두 등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止)하여 분별없이(中道) 관찰(觀)하는 것을 통해 무아와 연기, 중도와 공,
자비를 깨달아 가는 것이다.
현재 한국 불교의 핵심 수행법인 간화선 또한 부처님의 수행법과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 원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면서도 최상승 근기의 수행자들을 위한 역사적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간화선에서 간(看)은 ‘볼 간’자로 이 또한 본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본성을 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워하기에, 화두를 주고
그 화두를 의심함으로써 그 의심 자체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화두를 통해 정정과 정념, 즉 지관의 수행이 이루어진다. ‘분별없는 관찰’이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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