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개똥이다♣
깨달음이 개똥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하긴 어떤 선사는 도(道)는 마른 똥막대기라는 표현도 했다고 하긴 했는데 깨달음이
개똥이라니, 도대체 이 무슨 얼토당토 안한 표현이란 말입니까?
지금부터 대중가요를 듣는듯이 편하게 깨달음이 개똥이 되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분별심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중생신세를 못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마음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한 두번 들어보신 내용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약간 문학적인 표현을
가미하여 아담이 이브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나서 분별심이 생겨났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불교의 사상으로는 열반에 비교할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쫓겨났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별심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는 분별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매일 매일 사용하면서도 이 분별심의 실체를 꼭 집어 무엇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은 분별심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보통 알고 계시는 경전적인 설명으로 정리하자면 우리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온(五蘊)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는데 그 과정은, 우리의 마음이
외부의 대상(色)을 받아들이면서(受), 먼저 대상을 마음이라는 스크린에 인식하고 되고(想),
그 결과 의지나 욕망이 생겨나거나(行) 인식이나 분별작용(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별작용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나와 남,둘로 보게 되고 그 결과 아상(我相)이
생긴다고 하지요.
경전에서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에 따라 이것을 좀 더 세분하여 아상인생중생상수자상
(我相人相衆生相壽子相)의 사상(四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그럼 사상(四想)이라고
지칭하는 사상(四相)인 아상인생중생상수자상(我相人相衆生相壽子相)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의 상(想)이라 함은 원래 존재하지 않던 생각의 흐름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어짐에
따라 쉼없이 흐름이 생겨나면서 실체가 생겨나게 된 것이며, 이를 비유를 들자면 마치
호수에는 원래 아무런 물살이 없었지만 호수의 물이 호수를 빠져나가 계곡을 따라 흘러가면서
만들어지는 물살의 흐름과 세기를 상(想)이라고 총칭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인도의 성자들이 표현하기를 이 상(想)을 부숨으로서 해탈하여 열반에 도달한
사람을 비유하여 마치 큰 바다에 마침내 도달했다라고 하는 표현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의미가 바로 이 물살이 사라져 더 이상 어디로 물이 흘러갈 일이 없어진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상인생중생상수자상(我相人相衆生相壽子相)의 사상(四想)은 원래 하나의 물살이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짐에 따라서 이름이 나뉘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 분에게 누가 꼬집으면 아픕니다. 이 경우 누가 왜 꼬집었다라는 생각이 들기
보다는"내가 아프다"라는 느낌이 먼저 들지요. 이것은 아상(我相) 즉 "내가 있다"라는 느낌을
만들게 되며 이것이 아상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인상(人相)은 우리가 강아지를 볼 때, "강아지가 있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강아지를 보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을 인상(人相)이라고 합니다. 중생상(衆生相)은 가족을 예로
들면 여기에는 아버지, 어머니도 계시고, 형제, 자매도 있습니다. 즉 가족구성원의 존재를
인식함으로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을 중생상
(衆生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자상(壽子相)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상(相)을 수자상(壽子相)
이라고 합니다.제가 부처님이 전법을 하던 그 당시에 이 사상(四相)을 언급한 배경은 정확히 잘
모르지만,아마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장과정에 따라서 하나씩 차례대로 가지게 되는 상이 이
사상(四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즉 아상은 인간이 태어나서 아기때 처음 가지게 되는
상이 아상(我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인상(人相)은 아상(我相)이 어느 정도 생겨난 후에
외부의 대상을 한 덩어리로 인식하면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인상(人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중생상(衆生相)은 좀 더 성장하여 인식하는 대상이 세분화됨으로서 생겨난 것이 중생상(衆生相)
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점차 자신의 성장 또는 노쇠와 더불어서 주변의
대상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만들어진 것이 수자상(壽子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렇게 설명은 길게 했지만 결국은 실체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분별심입니다.
이 분별심이라고 함은 시간과 대상에 따라서 점점 강화되면서 달라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비유를 들면 우리가 창도 문도 없는 방안에 있다면
동서남북이 구별이 되지 않지만, 바깥에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면서부터 동서남북을인식합니다.
그리고 동쪽을 바라볼때는 대상에 비해서 우리의 위치는 서쪽 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서쪽의
대상을 바라 볼 때는 상대적으로 우리가 동쪽에 있다고 인식하지만 결국 외부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원래 고유한 좌표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외부의 대상을 인식함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은 대상에 따라서 바뀌는 가상의 좌표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우리 자신과 보통 동일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은 우리가 자신과 보통 동일시하게 되는데, 실제로 우리의 몸안을 살펴보자면 우리
자신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은 우리가 사용하는 대상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며,
다리나 몸통, 머리 등 우리 신체중에 어떤 부분도 우리가 쓰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따지면 우리의 몸을 포함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어떤 것도 우리라고 정의를 내릴만한 것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이렇게 대상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 자신을 정해진
상(相)으로 우리 자신을 정의할 수가 없으며 때문에 대상이 없다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우리는 실재(實在) 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물살을 예로 들면 들었듯이, 물살은 원래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높낮이의 차이에
따른 위치 에너지가 물살을 만들듯이 나와 남이라는 분별심이 아상과 같은 망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 망상을 실재(實在)로 여겨 욕망을 만들어내고 행위가 뒤따르게 되니, 이 행위의 거래에
따라서 업(業)이라는 삶의 대차대조표가 생겨나며 되었습니다.
매번 삶을 살면서 안게 되는 손해와 이익이 다음 생으로 이월되는 것이 우리의 업입니다.
삶의 대차대조표의 각 변의 값이 0 에 수렴할 때까지 우리가 삶과 죽음을 되풀이를 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설명하는 생사(生死)의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이 모든 설명도 그냥 생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모든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자성은 공하다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리 그럴 듯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모자를 잡고서 머리라고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잠속에서 자신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으면서 "나는 잠을 깼다"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설명은 깨달음을 얻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그러나 왜 이 글을 굳이
썼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대해서 고민을 끊임 없이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수행을 해도, 공부를 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고 괴로워합니다.
이렇게 수행에 진척이 안되어서 고민하는 이들은 무척 많은데 그러나 그 원인을 정작 자신의
수행태도나 내면에서 돌아보는 이는 적은 것 같습니다.
말만 하면 다른 사람의 행위를 옳다 그르다 말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길을 걷는 다른 수행자나
선사들의 태도를 비방하며, 또 자신이 믿는 종파나 지도자에게는 무한한 믿음과 찬사를
하곤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생명사랑, 환경보전, 나눔실천등 생명과 사회와 자연에 눈을 돌려
열정적으로 운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진정한 깨달음은 인류와 사회에 회향을 해야 진정한 깨달음이다라고 주장을
펼치며 마음공부에만 몰두하고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이들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펼치고 있으며, 어떤 주장은 사회와 이 세상에 긍정적인
결과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면을 돌아보는 마음공부는 바깥이 아닌 내면을 향하기에,
이런 주장들이 수행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하는 모든 생각과 행위는, 그것이 비록 주위 사람들이나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더라도 깨달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위에서 말했듯이 잠을 진실하게 여겨 잠속에서 하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아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오히려 망상을 이어가게 만들지, 망상을 깨는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직 체험을 하기 전이라면, 오로지 마음공부에만 관심을 두고 주위 사람과 세상일에
초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갖 분별과 망상속에 살아가면서이 분별과 망상을 벗어나고 싶다고들
말을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돋보기로 종이를 태우려면 최대한 초점이 작고 정확해야 하듯이 우리가 인식하고 반응하는
세상의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이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깨달음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오로지 모든 관심을 외부의 현상으로부터 오직 내면의
이 한 가지일에만 몰두하고 관심을 기울여야만, 다음 내생을 기약하지 않고서 이 생에라도
수행의 결과를 맛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망상은, 견성을 통하여 공(空)을 체득하게 된다면 경전의 모든
말씀이 다 진실 되다라는 것을 누구의 설명이 없어도 스스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망상(妄想)도 공하고, 업(業)도 공하고, 육도(六途)도 공하다는 것을 굳이 경전이나 조사 어록을
굳이 읽지 않아도 이해하게 되지만,깨달음 후의 수행은 옛 사람이 남긴 경전과 어록을 읽고
깨우침으로서 점점 그 초점이 밝고 선명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체험 전이라면 이런 모든 경전의 모든 설명이 쓸데없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달음의 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운전면허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책으로 아무리 공부를 했다고
해도 자동차를 한번도 구경을 못한 사람이자신은 운전을 잘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체험이 없는 사람은 경전이나 문자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의 뜻은 생각의 주머니를 털어버리고, 생각의 흐름을 끊는데 주목적이
있지만, 알음알이로 경전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아상이 철벽같이 공고해져 좀처럼 수행의 효과를
보기가 힘듭니다.
반대로 아상을 비운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체험이 없이 생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모든
것은 공(空)하고 우리도 무아(無我)다라는 구절에서 무기(無記)라는 샛길로 빠지게 됩니다.
차라리 체험이 없으니 나는 부처님의 말을 한 마디도 못알아 듣는다라는 심정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됩니다.
그럼 "체험이 없는 사람은 무엇에 의지를 해란 말입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시대부터 한국에 불교가 건너오기 전까지 법을 펴는 가장 큰 도구는 "설법"이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부처님의 제자뿐 아니라 중국의 조사나 선사들의 설법을 듣고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무수하게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법의 전제조건은 단지 견성의 문을 넘어서 불이법에 완벽하게 통달해야 합니다.
만약에 법을 전하는 이가 법을 알지 못한다면 법을 듣는이가 평생을 법을 듣는다고 해도 깨칠
수가 없습니다. 법을 깨치는 것은고사하고 법을오해하여, 업장만 쌓이니 이것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까?
한국불교만이 간화선을 수승하다고 주장하는데, 법을 알고서 방편으로 쓰려고 들면 세상에
버릴 것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화두를 들고 혼자 선방에서 참선하는 것이 깨달음의 전제조건
처럼 되어버린 것이 한국 불교입니다만, 화두참구를 통해 스스로 깨쳐야 하는 간화선과는 달리,
법을 아는 스승의 설법을 통해서 또는 문답을 통해서 한 순간 통밑이 뚫리는 체험을 하는
조사선은 무척 효과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심스럽다면, 육조스님, 회양스님, 조주스님, 마조스님, 원오스님, 대혜스님, 등 무수한
선사들에게서 법을 이은 전법제자(傳法第子)의 숫자를 인터넷에서 한번 검색해 보시면,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선사들의 깨침의 사례들은 용담스님과 덕산스님과의 일화에서 처럼 알다시피 대화나
설법중에 많이 일어납니다. 아니면 설법을 듣다가 큰 의심이 생겨서 그것이 지속되다가, 방이나
할과 같은 계기를 만나 통밑이 빠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또한 재가자라도 깨달음을 얻었다면 법상에 올라 사부대중을 대상으로 설법을 펴는 티벳불교와
달리 한국 불교에서는 대부분 법을 알지 못해도 스님들이 출가연수가 조금 오래 되었다고
법상에 올라서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법에 눈이 어두운 스님들이 사부대중에게 전하는 내용은 "불이법(不二法)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법(二法)이다보니 이 스님들의 법문은 사부대중뿐만 아니라 법문을 펴는 스님들도
스스로를 얽어매는 밧줄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깨닫지 못한 이들이 수파불(水波不二)이라는 표현을 들어도 알음알이로만 이해를 합니다.
"물살이 진실하다"라고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물살은 진실하지 않다"라고 여기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면 현상적으로 진실하다고 여기던, 진실하지 않다고 여기던, 아님 둘 다 진실하지 않다고
여기던간에 체험을 하지 못하여 여전히 생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말로는 아무리 그럴 듯하게
이해를 했다고 해도 이는 다시 생각의 흐름이라고 하는 물살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일러, 중생들은 파도가 진실하다고 여겨 파도에 집착을 하고 있으며, 소승들은
"파도가 진실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옳다고 여겨 이를 집착하고 있으나 보살과 부처는 "파도를
진실하다는데도 집착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다는 데도집착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그 뜻입니다.
결국은 팔만대장을 줄줄 외우고 꿰고 있다 하더라도 체험이 없다면, 이 모든 경전의 모든 말씀이
당나귀를 얽어매는 마구니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법을 펴는 이는 적어도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는 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을 하다 돌아가실 때,
"나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도대체 깨달음은 무엇이더란 말입니까?
이렇게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 약에 쓸 개똥이다"
- 작자미상(無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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