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한시 감상

미암일기(眉巖日記)2.

qhrwk 2025. 11. 13. 07:36

관리들의 내면

미암일기는 조선시대 개인의 일기 중 가장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소개한 일기들과 달리 자기의 일상생활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하여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당시 상류층 일반학자들의 생활상황을 엿볼 수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귀중하다. 

 

본인이 중앙의 요직으로 있었던 만큼 선조(宣祖) 초년에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물론

각 관서의 기능과 관리들의 내면적 생활 및 사회, 경제, 문화, 풍속 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관리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광화문 앞에 모여 대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침 식사는 대궐 안에서 먹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는 임금이 술을 내리는데, 내시가 술을 따르기 전에 엎드려 절을 하고 

받아 마셔야 했다. 

하사받은 술은 영광이요 은총이기에 토하지도 못하고 끝까지 참았다"

"급여는 1, 4, 7, 10월에 받았다. 

미암은 쌀 13섬, 보리 1섬, 명주베 1필, 삼베 3필을 받았다. 

그 외에 임금께서 노루 한 마리, 말린 꿩 네 마리, 말린 대구 네 마리,
말린 큰 새우 네 두름, 젓 한 항아리 등을 하사했다."

조선시대 상류층 가정의 일상 생활

또한 그의 일기에는 퇴계 이황과 학문적 견해가 달라 자주 논쟁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가 이름이 알려진 장서가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도 있다. 

그가 장서를 구축한 방법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중앙과 지방의 목판에서 책을 찍어내고, 기증을 받고, 사들이고, 교환하고, 중국에서 수입하고, 

필사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3500여 권에 달하는 거대한 장서를 마련했다고 한다. 

사후 20년,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서책이 사라졌지만 만약 이 책들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조선 전기 사대부 

사회의 지적 활동 규모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희춘은 15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정언 등의 벼슬을 거쳤으나,

1547년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다시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1575년 이조참판을 지내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글쓰기로 보냈다.

『미암일기』외에도『속몽구』,『역대요록』등을 남겼다. 담양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는

미암집 목판 396판(1869년 판각), 고문서(1910년 이전 197건),
전적(1910년 이전 36건), 유품, 의암서원 관련 자료가 보관돼 있다.

 여류문사 송덕봉
미암이란 호는 그의 고향 해남에 있는 미암 바위에서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미암은 해남출신인데 유물이 담양에 남아있는 것은 부인 송 씨가 담양 출신이기 때문이다.

미암은 24세 때 결혼과 함께 과거급제를 해 관직에 오르면서 거처를 담양으로 옮겼다.

그의 아내 송덕봉은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4대 여류 문인'으로 불린다.

최초로 문집을 낸 '여류문사'였는데, 남편이 엮어낸 그 문집은 분실되었고
'미암일기' 등에 그녀의 작품이 일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