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장 십불(十佛)
“십불(十佛)의 성불에 대하여 화엄경에서 ‘순간순간(念念)마다 새롭게 번뇌를 끊어 부처가 되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전의 경지이자, 더 수행해야 할 것이 남아 있는 경지인 배우는 단계(學地)에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그 뜻은 무엇인지요?”
“삼승교(三乘敎)에서의 삼신불(三身佛)이 되는 것은 수행의 단계(因時)에서는 배우는 단계(學地)에 머물러 갖가지 행(行)을 닦고 부처의 단계(果時)에 이르러서는 배움이 없는 단계(無學地)에 있으면서 닦지도 배우지도 않고 오직 과위(果位)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승(一乘)에서의 부처는 자타(自他)를 함께 같이 이루기 때문에, 이미 성불한 이후에도 오직 과지(果地)에만 머물면서 인행(因行)을 닦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또는 부처가 되는 것은 일체중생과 더불어 먼 옛날부터 이미 부처를 이루었고 이후에도 그렇게 이룰 것이므로 십세·구세 그 어느 때라도 부처를 이루지 않은 때가 없으니, 동일한 연기(緣起)의 인과(因果)이기 때문입니다.”
“삼승교 가운데에도 이러한 뜻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 십불(十佛)만 그러하다고 하시는지요?”
“삼승교에서는 단지 일진여법신(一眞如法身)에 의거하여, 일체(一體)이지 이의(二義)는 없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별별상속(別別相續)하는 사사문(事事門) 중에서는 이와 같은 뜻은 아직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삼승과 일승은 같은 차원이 아닙니다.”
의상에 의하면 삼승의 성불은 삼신불(三身佛)을 성취하는 것이고 일승의 경우는 십불(十佛)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었다.
성불은 개인적인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상호 관계성과 성불의 진여성(眞如性) 그리고 중생 구제라는 대승의 원(願)을 결합시켜서, 성불된 입장이라 해서 서로의 상관 관계를 망각하지 않는다. 성불한 자는 모든 것이 진여(眞如)로 이해되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든 관계의 그물망이 그에게는 한결같은 부처로 경험되게 되는 ‘동일한 연기(緣起)의 인과(因果)’이기 때문이다.
이 동일성(卽)의 관점에서는 시간관 공간으로 구분 되어지는 모든 중생들이 동시에 그리고 함께 성불한다. 번뇌와 차별의 존재들이 각기 그대로(事와 事가) 진리로 상관 관계를 맺게 된다.
“이 십불(十佛)은 각기 뜻이 달라 뒤섞이지 않지만, 십불의 공덕은 그 하나하나의 공덕마다 십불의 열 가지 뜻을 다 갖추고 있어서 다함이 없습니다. 화엄경에 ‘일체제불(一切諸佛)의 몸은 오직 하나의 법신(法身)이며 하나의 마음이고 하나의 지혜이며 힘(力)과 두려움 없음(無恐)도 그러하다’ 라고 하셨습니다.
자재(自在)한 공덕으로 알지 못함이 없으므로 부처라고 합니다. 이 십불(十佛)이 바로 모든 존재(諸法)의 궁극적 근원입니다. 십(十)은 바로 다함 없음(無盡)을 나타내며, 이 하나 속의 열, 열 속의 하나, 하나가 곧 열, 열이 곧 하나로서, 이 십(十)은 또한 상즉상입(相卽相入)과 무애자재(無碍自在)와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엄 스님의 수현기(搜玄記)에 보면 화엄경 본문 해석에서 여덟 가지로 구분한 가르침과(八敎)와 서로 다른 삼교(三敎)의 가르침을 이야기한 뜻은 무엇인지요?”
“그 대의(大意)는 화엄경 안에 일체의 교(敎)·의(義) 등이 포함되지 않음이 없음을 드러내려고 한 것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두 번째 7일에 보리수에서 큰 근기의 사람(大人)들을 상대로 큰 가르침(大法)을 설하실 때, 모든 허공법계(虛空法界)의 모든 미진처(微塵處)에서 십세·구세의 앞뒤 시간에 모든 오승·삼승·일승·무량승의 근기에게 모든 법문을 그들의 근기에 맞춰 단박에(頓頓) 설하심에, 그곳에 있던 여러 근기의 중생들이 각각 자신의 근기에 맞춰 듣고(聞) 이해하고(解) 실천하여(行) 깨달았습니다(證).
이처럼 일체의 교(敎)·의(義)의 십십법문(十十法門)이 단박에 동시에 드러날 때 큰 근기의 사람(大機人)이 이러한 법문을 보고 듣고 이해하고 실천하여 깨달았습니다. 한 곳(一處)과 모든 곳(一切處)에서 한 때(一時)와 모든 때(一切時)에 하나의 근기(一根)와 모든 근기(一切根)의 중생들이 하나의 행(一行)과 모든 행(一切行)을 단박에 수행하는 것에서 부터 삼계의 육도(六道), 사생(四生) 등의 인과법(因果法)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김없이 이 화엄경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엄 스님께서 여덟 가지 가르침과 세 가지 가르침으로 구분하여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십불(十佛)의 설법은 그 모습이 어떠한지요?”
“삼종세간(三種世間)이 모두 실유(實有)이고 부처님의 삼업(三業)이 모두 중생을 이익이 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전체적으로 십불(十佛)의 설법이라고 합니다.”
“만약 부처와 중생이 동일연기(同一緣起)라고 하면 부처의 측면에서 보면 모두가 부처로서 중생이 없고, 중생의 측면에서 보면 모두가 중생으로서 부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화하는 주체(能化)와 교화되는 대상(所化)이라는 구별되는 뜻이 있을 수 있게 되는지요?”
“모두 부처라고 해도 모두 중생임을 버리지 않고 모두 중생일 때도 모두 부처라는 뜻을 버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부처라고 해서 중생이 없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중생이라고 해서 부처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그윽하게(冥) 둘이 아니지만, 서로 섞이지 않으니 어떻게 교화하는 주체와 교화되는 대상의 뜻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주체와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체와 대상이 또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는 온전히 깨친 사람이고 중생은 온전히 미혹된 존재입니다. 만약 부처가 중생과 같다면 둘 다 미혹된 사람일 뿐인데 어떻게 교화하는 부처가 있을 수 있는지요? 만약 중생이 부처와 같다면 둘 다 온전히 깨친 사람일 뿐인데 어떻게 교화되는 대상이 있을 수 있는지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모두가 중생이므로 교화하는 주체가 없다는 것도 옳고, 모두가 부처이므로 교화할 대상이 없다는 뜻도 옳은 말이며, 모두가 중생과 부처, 둘이 되므로 주체와 대상이 있다는 것도 옳은 말입니다. 막힘 없고 걸림이 없는(無障無礙) 가르침은 하나만 있다고 고집하지 않으므로 필요한 바에 따라 모두 옳으니, 마치 허공을 교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인의 말씀에 대하여는 연기의 법에 대하여 분별하는 마음으로 헤아리는 견해를 내지 마십시요. 연기의 법에 대하여 분별하는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절대 아닙니다.”
“부처가 미혹된 중생으로 볼 때 미혹으로 보는지요, 아니면 깨달음으로 보는지요? 만약 미혹으로 본다면 미혹은 미혹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미혹을 볼 수 있는지요? 만약 깨달음으로 본다면 깨달음은 미혹이 아니므로 제대로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중생을 볼 수 있는지요?”
“두 가지 모두 옳고 두 가지 모두 옳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면 둘 다 옳다고 말한 것은 만약 미혹이 아니면 미혹을 볼 수 없으므로 미혹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미혹을 본다고 이미 말하였으므로 보는 것은 미혹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으로 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너와 다르지 않은데 네 스스로 다르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은 부처님은 중생을 볼 때 모두 나의 몸이라고 보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부처인 것을 너희 중생들은 알지 못하고 헛되이 스스로 모든 고통을 받으므로 영원히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을 일으켜 중생을 버리지 않아서 함께 닦아 함께 깨달음을 이루고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즐거워하면서 잠시도 버리고 떠나는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부처님을 ‘큰 자비를 가진 소(佛隨世間如犢子 是故得名者悲牛)’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먼 것으로 가까운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수행하면 일체의 사람이 성불한다는 뜻은 무엇인지요?”
“이것은 모든 존재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분리할 수 없다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관점에서 사람을 본 것을 말한 것으로 한 사람이 곧 일체의 사람이고 일체의 사람이 곧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닦음에 대하여 말해도 그러하니 한 사람의 닦음이 일체의 사람의 닦음이고 일체 사람의 닦음이 한 사람의 닦음입니다. 그러므로 다 같이(同) 성불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현재 한 사람이 수행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행하지 않으며 그 한 사람이 나머지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는지요?”
“그대가 보는 것은 존재들이 서로 상관 관계가 없는 고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인 변계(遍計)일 뿐입니다. 연기의 법과는 관계없으니 말하기에 족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악을 행하여 나머지 사람이 하늘에 태어난다는 것은 어째서 그러한지요?”
“이것은 선과 악이 서로 의지한다(相是)는 뜻에 의거하여 말한 것입니다. 즉, 이 악은 저 선이 아니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저 선이 곧 이 악에 의지하였으므로 이 악 때문에 하늘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 때문에 지옥에 태어난다는 뜻도 이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곧 선이라는 뜻에서 하늘에 태어난 것이고 선이 곧 악이라는 뜻에서 하늘에 태어난 것이 아니지 않은지요?”
“그것도 그러한 것이, 그 뜻은 어렵지 않습니다. 선이 곧 악의 뜻이므로 악으로 하늘에 태어나는 것도 가능합니다.”
“선과 악은 순생(順生)하고 역생(逆生)하는지요, 아니면 불생(不生)이기도 하는지요?”
“그것도 가능합니다. 불생(不生)과 생(生)은 인연을 따르므로 모두 막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두 가능하지 않기도 합니다. 집착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상은 앞의 문답을 토대로 화엄경을 설하는 주체인 십불(十佛)의 성격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부처가 되는 화엄의 부처관과 한 사람이 성불(成佛)하면 모든 존재가 성불하는 화엄의 성불을 말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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