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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9권 《화엄경문답》 - 제5장 삼승(三乘), 일승(一乘)

qhrwk 2026. 5. 24. 06:02

 

 

제5장 삼승(三乘), 일승(一乘)

 

“해행위(解行位)에서 하나의 법문을 얻음에 이르렀을 때 모든 분별식(分別識)의 장애가 없어지는지요, 아니면 나머지 법문을 아직 얻지 못하였으므로 나머지 장애는 없어지지 않는지요?”

“하나의 법문을 얻을 때 모든 장애가 없어지는 것도 옳고 나머지 법문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나머지 장애가 없어지지 않는 것도 옳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이 하나의 법문이 곧 나머지 법문을 모두 다 포괄하고(盡), 이 하나의 장애가 곧 나머지 장애들이기 때문에 하나의 법문을 얻을 때 나머지 법문을 얻지 못함이 없고 하나의 장애를 끊을 때 나머지 장애들을 끊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의 법문을 얻었지만 나머지 법문들을 얻지 못하였고 하나의 장애를 끊었지만 나머지 장애들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무량겁(無量劫) 동안 차례대로 새롭게 번뇌의 장애를 끊고 새롭게 법문을 얻으니 이것이 곧 한때(一時)에 하나의 법문(一門)을 얻음입니다. 이 하나의 법문이 아니면 저 나머지 법문이 곧 없게 되고 이 한때가 없으면 저 무량겁이 곧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뜻으로 그렇게 되는지요?”

“부분(一)과 전체(多)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앞과 뒤가 서로 의존하면서 서로 포함하기(相入)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재동자는 무량겁(無量劫)동안 무량(無量)한 선지식을 모시고 무량한 법문을 얻었지만,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두 번째 7일 한때의 가르침에 불과하였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의상은 앞의 성불과 마찬가지로 화엄의 법문은 하나를 얻으면 나머지도 모두 얻는 일다상시(一多相是), 전후상시(前後相是)로서 하나씩 차례대로 얻는 삼승과 차이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었다.

 

“삼승교(三乘敎)에서 여러 수행의 위계를 제시하여 중생이 진리에 대해 믿고 이해하려는 마음(信解)을 내게 한 것은 제시한 대로 수행하여 삼승 자신의 궁극의 경지에 이르게 하려던 것은 아닌지요, 혹은 그러한 자신만의 궁극적 경지(自究竟果)에 이르는 사람이 있게 하려던 것이 아닌지요?”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무릇 삼승교의 큰 의도는 중생이 진리를 믿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것으로 중생의 뜻에 따라 이론을 제시한(安立)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여러 층이 있으니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처음 방편의 가르침을 듣자 마다 그 방편의 의도를 알아채고 곧바로 일승(一乘)에 들어갑니다. 또한, 가르침을 들었지만 방편의 의도를 알지 못하여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기에는 여러 부류가 있어 각자 근기에 따라 수행이 무르익은 곳에서 일승(一乘)의 위계(位)에 들어갑니다. 근기가 가장 둔한(鈍根) 사람은 들은 가르침대로 하여 삼승 자신의 궁극의 경지(自究竟果)에 이른 후 비로소 일승(一乘)의 견문위(見聞位)로 전향(轉向)하여 다시 들어갑니다. 일승(一乘)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으므로 처음 듣는 것과 같습니다.”

 

“일승(一乘)의 처음인 견문위(見聞位)에 들어감이 그와 같이 일정하지 않다면 그 견문위에서 퇴보하는 양상은 어떠한지요?”

“큰 가르침을 들었지만 곧바로 들은 대로 자재(自在)하지 못하여 미세하게 가르침에 어긋나 삼악도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지요?”

“화엄경에 부처님께서 작은 빛을 비춤으로 인해 아비지옥의 사람들이 빛을 받아 곧바로 도솔천에 태어나 허공의 소리를 듣자마자 십안(十眼)·십이(十耳) 등의 큰 공덕을 얻는다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전에 큰 선근(善根)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러한 큰 공덕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방편으로 지옥에 가서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일승의 견문위에서 퇴보한 사람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지요?”

“이미 허공의 소리에서 ‘너희가 받은 지옥의 고통은 어디선가 오거나 가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악업에 감응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퇴보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삼승의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上果人)은 이미 다음 생을 발생시켜 윤회의 주된 원인이 되는 업번뇌(業煩惱)가 다 없어졌는데 어떻게 업번뇌를 주된 원인으로 하고 대비(大悲)를 보조적(助) 원인으로 하는 악취에 가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요?”

“삼승 자신의 종(自宗)에서의 업번뇌는 다 없어졌더라도 일승의 번뇌(障)가 끊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악취에 가지 않겠습니까?”

 

“이 일승의 번뇌는 삼승 자신의 종(自宗)에서 끊은 번뇌인지요, 아니면 그와 별도의 것인지요?”

“그 뜻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장애가 되는 바가 같지 않으므로 다르다고 할 수도 있고 앞에서 끊었지만, 이 일승에서는 모두 끊은 것이 아니므로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번뇌(惑法)는 자성이 없어서 상황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앞의 삼승에서 얻은 지혜는 이 일승에서는 장애가 되는 것인지요, 그렇지 않은 것인지요?”

“장애가 될 수도 있고 장애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宗)에서는 지혜이지만 일승의 무장애법(無障礙法)을 알지 못해 장애가 되고, 비록 알지 못하지만 일승으로 나아가는데 어긋나지 않으므로 장애가 아닙니다.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삼승의 수행자가 끝내 부처가 된 후에 다시 일승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는지요?”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미 양, 사슴, 소가 끄는 세 수레가 있는 곳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큰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달라고 하자 부처님이 곧 하나의 수레를 주었다고 말씀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 세 수레가 있는 곳은 삼승과(三乘果)를 비유한 것이므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의상은 앞의 일승과 삼승의 법문의 깨달음의 차이를 배경으로 삼승으로 수행한 사람은 그 가르침의 구경의 지위(極果)에 도달한 후 일승의 가르침을 다시 수행해야 한다는 삼승극과회심설(三乘極果廻心說)과 일승의 부처와 삼승의 부처와 불국토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었다.

 

“구세(九世)와 십세(十世)의 법에 의거하여 모든 존재(諸法)를 남김없이 포괄할 수 있는지요?”

“이 문(門)에는 남김 없음(盡)과 남김 없지 않음(不盡)의 뜻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남김 없음의 문(盡門)이면 남김 없고(盡) 남김 없지 않음의 문(不盡門)이면 남김이 있습니다(不盡). 동체(同體)·이체(異體) 등의 문(門)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한 사람의 상속(相續)에 의거하여 구세(九世) 등을 짓는다면 과거에는 축생, 현재에는 사람, 미래에는 부처라고 할 때 화엄경에서는 ‘일체중생의 마음이 삼세에 두루 있다.’라고 말씀하였고 ‘한순간(一念)이 무량겁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과거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과거-과거로서 곧 스스로 해당하는 때의 축생이고 둘째는 과거-현재로서 그 축생이 현재의 사람인 것이고 셋째는 과거-미래로서 그 축생이 미래의 부처인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 삼세가 됩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사람일 때의 삼세와 미래의 부처일 때의 삼세의 구세법(九世法)이 곧 한 순간(一念)인 것이 열번 째 세(世)가 되며 이것은 즉문(卽門)에 의거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화엄경 보현행품(普賢行品)에서 ‘과거가 미래이고 미래가 과거이며 현재가 과거와 미래임을 보살은 모두 다 안다.’라고 하였고 게송에서 ‘삼세가 한순간(一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문(中門)은 이에 준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상속과 마찬가지로 일체 존재들도 그러합니다. 일체가 곧 하나이기 때문이고 사람과 존재(法)가 상즉(相卽)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나의 몸이 미래세에 부처가 된다면 그 미래세의 부처가 현재의 나의 몸을 교화하여 수행하게 하는지요, 혹은 그렇지 않은지요?”

“교화하여 수행하게 합니다.”

 

“그 부처는 지금의 내가 수행하여 얻은 것인데 어떻게 지금의 나를 교화하여 수행하게 할 수 있는지요?”

“그 부처가 교화할 수 없다면 지금 나의 몸은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부처가 교화하여야 비로소 내가 수행하여 그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뜻은 왜 그러한지요?”

“연기(緣起)의 도리에 의거한다면 그 부처가 없으면 곧 지금의 내가 없고 지금의 내가 없으면 곧 그 부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에 상대하는 것처럼 과거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미래의 부처가 곧 과거의 축생이라는 것 등은 부처가 될 때 곧 옛날에 이루어졌다는 뜻인지요?”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자기 자신인데 어떻게 교화를 하는지요?”

“남이 아니므로 교화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남이라면 교화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바깥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교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스스로 이미 부처인데 어떻게 교화를 하는지요?”

“부처이기 때문에 교화를 합니다. 만약 부처가 아니라면 온종일 교화해도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본래 부처가 되어 있지만 스스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므로 교화하여 스스로 부처임을 알게 합니다. 교화하여 스스로 부처임을 알게 하는 것을 ‘교화(化)’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화는 교화하는 바가 없고 참된 이룸은 이루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만 자기 자신이므로 곧 교화하는 것이고 남을 교화하는 뜻은 전혀 없는 것인지요?”

“남을 교화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 아니면 자신이 없고 자신과 남이 인연(因緣)으로 이루어져 구별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자신이 온전히 남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따로 중생을 교화함이 없습니다. 교화함(化)과 교화하지 않음(非化) 등의 사구(四句)와 자신과 남 등의 사구로 분별하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고 덕을 드러내면 마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에 될 부처가 다시 자신의 현재를 교화한다는 것을 어떤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는지요?”

“영락경(瓔珞經)에서 제8지 보살에 대해 ‘자신이 미래에 얻을(當得) 여러 부처님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설법하는 것을 스스로 본다’ 라고 하였으므로 이미 그 말이 명확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여러 경전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부처를 예배하여 여러 죄업이 없어진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미래의 여러 부처는 과연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래서 무릇 부처가 중생을 위하여 부처의 공덕을 이야기하는 의도는 중생 스스로 자신도 그러한 불과(佛果)를 얻기 위해 수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자신이 미래에 얻을 과덕(果德)을 알고(證) 그것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남의 불과(佛果)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내가 발심하려 수행하는 부처는 오직 나의 미래에 얻을(當果) 이미 이룬 부처이지 소위 말해서 남이 이룬 부처가 아닙니다. 또한 남이 이룬 부처가 곧 자신의 미래에 얻을 부처입니다.

 

왜냐하면 남이 이룰 때 곧바로 삼세 부처의 평등한 과보를 얻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미래에 얻을 부처가 곧 지금 남이 이룬 부처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미래의 부처가 될 때 곧바로 삼세 부처의 평등한 법(法)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물고 물려(輾轉) 평등하고 평등한’ 부처님의 차별이 없는 과덕(果德)이 모두 지금의 나를 교화하여 수행하게 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몸 전체가 여래장불(如來藏佛)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본성의 부처(性佛)에 의지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하면서도 알지 못해 슬퍼하고 이상하게 여기며 지극한 마음을 내어 수행하여 미혹함을 돌이키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직접 교화하는 부처는 곧 나의 몸의 부처이니 멀리 남의 부처를 구하지 마십시요.

 

이 뜻은 바르게 보는(正觀) 수행자의 큰 요체입니다. 또한, 내 본성의 부처(性佛)는 곧 일체 법계의 유정 무정 중생들 모두에 있어 한 존재도 나의 몸의 부처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만약 자기 몸의 부처(自體佛)에게 예배할 수 있다면 예배하지 않는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이것도 바르게 보는 수행자의 큰 요체입니다.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이렇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모든 때와 모든 곳에서 한 곳과 한때도 삼독(三毒)의 번뇌를 일으키려는 생각(意)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일승(一乘)에 들어가는 직접적(親) 방편으로 삼세의 부처로서 이 행을 닦지 않고 부처를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이 깊고 깊은 법은 하나를 제시하면 일체를 모두 포섭하는 다함이 없는 자재(自在)한 연기법(緣起法)으로 바로 완전한 십(十)의 수로 드러나는 보법(普法)의 연기(緣起)의 도리입니다.”

 

의상은 과거·현재·미래가 상즉하는 일승보법(一乘普法)의 시간관을 설명하고 이에 기초하여 미래의 내가 성불하여 현재 중생인 나를 교화하므로 다른 부처가 아닌 미래의 부처로서의 자신을 예불하고 따라야 한다는 배자체불설(拜自體佛說)을 말씀하고 있었다. 아울러 지엄 스님의 수현기(搜玄記)에 나오는 십지(十地)중 제6지의 수행과 관련된 열 가지 십이인연관(十二因緣觀)중 수순무소유진관(隨順無所有盡觀)의 요점을 말씀하고 있었다.

 

“화엄경의 제7지에 이르러 비로소 이승의 사람을 넘어선다고 함에 해탈월보살이 ‘초지를 얻으면 이미 이승을 넘어서는데 어째서 여기서 비로소 넘어가는가?’라고 하자 금강장보살은 ‘초지가 이승을 넘어선 것은 대법(大法)에 힘입어 넘어선 것이지 자신의 지혜와 수행이 이승을 넘어선 것이 아니다. 실제 수행은 여기서 비로소 넘어선다. 비유컨대 왕태자가 처음 왕가에서 태어났을 때 곧바로 대신들을 넘어서는 것은 종성이 존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대신들을 다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배운 후에 비로소 넘어선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뜻으로 이야기 한 것인지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즉, 이미 대법(大法)에 힘입어 넘어선 것이지 자신의 지혜와 수행이 이승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십신(十信)의 초심(初心)이 곧 초지(初地)라는 뜻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고 실제 수행에서 십신 초심의 위계가 초지에 해당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십신(十信)의 초심이 곧 초지인지요?”

“이미 십지경론(十地經論)의 초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곳에서 십입(十入)을 세워 육상(六相)을 보였으므로 곧 초지가 십신의 처음에 낸 마음(初發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신해(信解)를 낳는 문(門)에서 신(信)·해(解)·행(行)·회향(廻向)·십지(十地)·불지(佛地)를 세웠으니 이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부분들을 아울러 수행해야 합니다. 즉, 믿음(信)을 닦을 때 해(解)가 없으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행(行)이 없이 어떻게 믿으며 회향(廻向)이 없이 무엇을 믿으며 또한, 체(體)를 증득함이 없으면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수행은 마땅히 이 부분들을 아울러 닦아야 합니다. 이미 수행을 아우르면서 신(信)의 완성(信滿)이 곧 해의 완성(解滿)이 됩니다. 그래서 위계 위계(位位)마다 위계를 만족하여 성불(成佛)함을 보입니다.

 

만약 이 문(門)에 의거한다면 제7지에 이르러 비로소 실제 수행의 이승의 단계를 넘어선다고 한 것은 곧 십신·십해·십행·십회향·십지의 단계 중 제7지에 이른다는 뜻으로 이는 공용(功用)과 무공용(無功用) 위계의 경계를 이야기한 것으로 실제 수행의 지극한 곳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한 곳은 위계를 나열함에는 불과(佛果)에 이르러 비로소 지극하고,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초지에서 지극하고, 법문(法門)을 이해하는 것은 해(解)의 처음에서 지극하고, 수행의 완성(行滿)은 신(信)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극하고, 보법(普法)의 실행(實行)은 위계 위계마다 지극하고, 법문 법문마다 지극합니다.

 

마치 선재동자가 행한 것처럼 처음에 문수보살을 만나고 중간에 문(聞)·해(解)·증(證)을 하고 나아가서 보현에 이르기까지 무량한 겁을 지나면서 티끌처럼 많은 수의 선지식을 만나 티끌처럼 많은 수의 법문을 얻어도 두 번째 7일의 한때를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깊은 뜻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십지 등에 대해여 이렇게 해설한 의도는 무엇 때문인지요?”

“삼승의 위계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의 근기를 성숙시켜 일승보법(一乘普法)에 들어가게 하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견문(見聞)·해행(解行)·증입(證入) 등의 세 단계는 보법의 위계인지요?”

“아닙니다. 다만, 삼승의 위계를 따라 이렇게 말하였을 뿐입니다. 보법(普法)의 바른 위계는 곧 위계가 없지만 위계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일체의 육도(六道)와 삼계(三界)의 모든 법계의 법문이 모두 보법의 위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한, 한 위계가 모든 위계이고 모든 위계가 하나의 위계입니다. 위계의 법문과 마찬가지로 모든 행(行)·교(敎)·의(義) 등의 법문도 다 그러합니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법(普法)에서는 어느 단계를 수행의 시작으로 삼는지요?”

“하나의 법문(法門)을 얻는 것을 시작으로 합니다. 이 시작은 곧 마지막과 차이가 없는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