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9권 《화엄경문답》 - 제3장 연기(緣起), 이사(理事)

qhrwk 2026. 5. 24. 06:00

제3장 연기(緣起), 이사(理事)

 

의상은 연(緣)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변하는 삼승의 연기(緣起)와 달리 일승의 연기는 연(緣)에서 자유로워 일승의 가르침도 특정 의미로 국한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되어 중생들을 인도한다고 말씀하고 있었다.

 

“삼승의 연기와 일승의 연기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삼승의 연기는 연(緣)이 모이면 있고 연(緣)이 흩어지면 곧 없습니다. 그런데 일승의 연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연(緣)이 합하여도 있지 않고 연(緣)이 흩어져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승의 연기법이 만약 연(緣)이 모여도 있지 않고 연(緣)이 흩어져도 없지 않은 것이라면, 어찌하여 ‘연(緣)이 모인다’든가 연(緣)이 흩어진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인지요?”

“비록 연기법이 본래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지만 상황에 응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익한 헛된 말이 아닙니다. 연(緣)의 모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곧 ‘연(緣)이 모인다’고 말하며, 연(緣)의 흩어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곧 ‘연(緣)이 흩어진다’고 말합니다. 흩어진다는 말에 의해 이해가 생기는 사람들에게는 곧 ‘흩어진다’고 말하지만, 그 때 비로소 흩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이미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모인다는 말에 의해 이해가 생기는 사람들에게는 곧 ‘모인다’고 말하지만, 그 때 비로소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이미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연(緣)의 모임과 흩어짐이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모임과 흩어짐이 정히 없는 것이라면 어찌 또한 바야흐로 모이고 흩어진다 고 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또한 연(緣)이 모이면 있고 연(緣)이 흩어지면 없다 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요?”

“연(緣)에 따라 있다거나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지라도 이미 연(緣)에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있다는 것이 꼭 있는 것이 아니요, 없다는 것이 꼭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곧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러므로 ‘꼭 있거나 꼭 없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緣)을 따를 때라도 곧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여러 뜻을 연(緣)에 따라 말할 수 있으니, 맞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맞는 바도 없습니다.

 

맞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자기 입장이라고 할 것도 없고, 자기 입장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옳다거나 그르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일승연기(一乘緣起)의 법은 정식(情識)으로 헤아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정식(情識)으로 헤아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리서 구하여야 할 것도 아닙니다.”

 

의상은 연기론의 뜻이 사물의 무자성(無自性), 공(空)을 드러내는 입장에서는, 사물은 연(緣)의 합산(合散)에 상관없이 언제나 공(空)이다. 연(緣)이 모일 때라도 공이요 연(緣)이 흩어질 때라도 공이다. ‘연(緣)이 모이면 있고 흩어지면 없다’고 보는 관점은 자칫 있음(有)와 없음(無)의 두 치우친 오해(二邊)에 빠져 공의 중도적 진실에서 이탈해 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었다.

 

“화엄경 십주품(十住品)에서 ‘지극히 큰 것(至大)에 작은 모습(小相)이 있음을 알기 위하여 보살은 이 때문에 발심하였네(欲知至大有小相 菩薩因此初發心)’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큰 것(大)이 인(因)·연(緣)으로 이루어졌으므로 큰 것이 곧 작은 모습이 된다는 것인지요,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인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곧 작은 모습이 있습니다. 이 큰 것은 온전히 작은 것의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因)과 연(緣)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요?”

“인과 연은 서로 다르고 관계도 없지만 남(他)이 아니므로 곧 그렇게 됩니다.”

 

“만약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것(小成)이 곧 이러하다면, 이루는 것(能成)인 인연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지요?”

“인연도 곧 이러할 수 있으니 필요한 바에 따라 막히지 않아 상즉(卽)과 상입(中)에 자재(自在)합니다. 이루는 것(能成)인 인연이 이미 이러하므로 이루어지는 존재(小成之法)도 또한 그러합니다. 일체의 인연에 의한 존재(因緣法)가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꿈에서 본 법(法)과 같이 오직 마음으로 헤아린 것이라는 것은 삼승교 중 유식문(唯識門)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조금 다릅니다. 유식문에서 보여지는 존재(法)들이 많지만 오직 하나의 식(識)이 만든 것이고 식(識) 이외의 다른 존재는 없습니다. 지금 취하는 일승(一乘)의 견해는 이 마음이 수면(睡眠)의 인연을 따라 갖가지 존재(法)들을 만들어낼 때 만들어진 이 여러 존재는 모두 인연에 의한 존재로 무주(無住)·무아(無我)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에 머무름이 없고 무엇이든 그렇게 되지 않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일승의 뜻은 ‘인연의 무주(無住)’에 의거하고, 존재를 만들어내는 마음(作心)에 의거하지 않으므로 유식문과 같지 않습니다.”

 

“이 인연의 무주(無住)는 곧 비유로 밝히려는(所喩) 연기법인데 어떻게 비유의 사례(能喩法)가 될 수 있는지요?”

“곧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일뿐 다른 것을 비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도 이 꿈의 인연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인연법에 비유하였을 뿐입니다.”

 

“일승(一乘)에서의 ‘세 곳에 회향한다(三處回向)’는 무슨 뜻인지요?”

“중생과 보리(菩提)와 실제(實際)의 세 곳에 회향할 때 회향하는 바가 없는 것을 회향이라고 부릅니다.”

 

“이미 세 곳에 회향하는데 어째서 회향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지요?”

“보살이 행(行)을 일으키는 것은 곧 중생을 위한 것이고 보살의 행(行)은 중생이 없으면 일으키지 않으므로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뜻 때문에 보살의 행은 옛날부터 중생의 것이며 단지 지금 중생에게 회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뜻을 이해하여 곧 주체(能, 보살을 가리킴)와 객체(所, 중생을 가리킴)의 둘이 없음을 아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중생 회향이라고 합니다.

 

또한 보리 회향(菩提回向)은 보살의 행은 깨달음(菩提)에서 나오고 보리를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보살의 행은 옛날부터 보리를 갖추었으며 다시 회향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보살의 행은 곧 여실법(如實法)이고 여실법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옛날부터 실제(實際)를 갖추어 다시 따로 회향할 곳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뜻으로서 일체 보살의 행이 그러하지 않음이 없는데 이러한 뜻을 이해하는 것을 회향이라고 합니다. 이 뜻은 연기의 도리(緣起中道理)에 깊이 나아간 것입니다. 일승과 달리 삼승의 회향은 구체적 일(事)을 따라 개별적으로 회향하는 뜻이 있음은 가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는 보살이 일체중생을 모두 제도한 이후에 부처가 되겠다고 발심하였다고 하고 어떤 글에서는 만약 보리를 얻지 못하면 중생을 구제할 수 없으므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보리를 수행했다고 합니다. 보살은 말과 행동이 상응해야 하는데 만약 앞의 글에 따른다면 중생을 다 제도하지도 못하였는데 어째서 보살은 이미 부처가 되었는지요? 만약 뒤의 글에 따른다면 먼저 부처가 되는 것이 어떻게 전자와 상응하여 행할 수 있는지요?”

 

“이것은 참으로 난해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깨달은 이치와 지혜에 막힘이 없고 중생의 근기와 인연을 따라 말씀하신 것이니 어찌 모순이 되겠습니까. 즉, 중생이 바로 보살이므로 보살이 부처가 될 때 성불을 이루지 못하는 중생이 없게 되므로 중생을 완전히 제도하고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도 옳고, 보살이 곧 중생이므로 보살이 영원히 부처가 되는 때가 없다고 하는 것도 옳습니다. 또한, 보살과 중생은 뒤섞이지 않으므로 먼저 스스로 성불을 이룬 후에 비로소 중생을 제도 할 수 있지 자신에게 덕이 없으면서 남을 제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해고 옳고, 보살과 중생은 불상지(不相知)하므로 보살은 제도하는 주체가 아니고 중생은 제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해도 옳습니다. 이러한 사구(四句)로 과실을 막고(遮過) 옳지 못함을 버리고(遣非) 덕을 드러냄(顯德) 등에서 자재(自在)합니다.”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을 때 중생의 악업을 인(因)으로 하여 생겨난 고통을 자신이 지은 과보로 하여 받는 것인지요, 아니면 중생의 업으로 생겨난 고통은 버리고 자신의 업에 감응한 고통을 받는 것인지요? 만약 전자라면 남이 지은 업을 어떻게 자신이 받을 수 있으며 만약 후자라면 다만 자신의 고통을 받는 것이지 중생을 대신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둘다 됩니다. 필요한 곳에 따라 자재(自在)하므로 삼승교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云云)”

 

“기신론(起信論)에서 진여로 무명(無明)을 훈습하고 무명으로 진여를 훈습한다는데 그것은 어떤 모습인지요?”

“남이 아니기 때문이고 불상지(不相知)하기 때문입니다. 즉. 진여는 평등(平等)하다는 뜻이고 무명은 스스로 미혹된다는 뜻이니 진여가 없으면 무명이 없고 무명이 없으면 진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훈습합니다. 이 뜻은 곧 사(事)·리(理)·명(明)·암(闇)의 상즉(相卽)과 상융(相融)하는 뜻과 분별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는 이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의상은 대(大)와 소(小)가 차이가 없고 보살과 중생이 구별되지 않는 무주(無住)의 연기(緣起)를 말씀하고 있었고, 기신론에서 이야기하는 무명(無明)과 진여(眞如)의 상호 훈습도 이와 마찬가지로 무분별(無分別)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었다.

 

“삼승(三乘)의 사(事)와 이(理)와 보법(普法)의 사(事)와 이(理)는 어떻게 구별되는지요?”

“삼승에서 사(事)는 마음의 연(緣)이나 물질적 장에 등이고 이(理)는 평등한 진여(眞如)이니, 비록 사(事)와 이(理)가 같지는 않지만, 상즉(相卽)하고 상융(相融)하여 서로 방해나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서로 방해하지는 않지만 사(事)의 뜻이 이(理)의 뜻은 아닙니다. 보법(普法)에서의 사(事)와 이(理)는, 이(理)가 곧 사(事)이고 사(事)가 곧 이(理)이며, 이(理) 가운데에 사(事)가 있고 사(事) 가운데에 이(理)가 있어서, 즉(卽)괴 융(融)의 관계 속에서 걸림이 없습니다.

 

비록 사(事)와 이(理)가 서로 섞이지는 않지만 그윽하여 둘이 아니니, 말에 따라 남김없이 드러나게 되며, 남김없이 드러나지만 또한 남김없이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사(事)와 이(理)에서 처럼 사(事)와 사(事)에서도 그러합니다. 마음으로써 일체법을 말하면 마음 아닌 것이 없고, 물질로서 일체법을 말하면 물질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람과 사물에 관한 기타 일체의 교의(敎義) 등 차별법문이 모두 그러합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하면 연기다라니의 걸림없는 법은 일법(一法)을 들어 일체를 남김없이 포섭하면서 무애자재(無碍自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승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이(理)를 폐(廢)하고 오직 사(事)를 말하여 한결같이 이(理)와 사(事)를 섞지 못하니, 사(事) 가운데서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일상(一相)의 교문은 정식(情識)에 머물러 이(理)를 남김없이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화엄 철학은 사(事)와 이(理)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그 특유의 세계관과 사상적 특징을 표명하고 있었다. 의상 역시 사(事)와 이(理)를 사상 전개의 중요한 개념 체계로 활용하고 있는데, 사(事)와 이(理)에 대한 삼승과 일승의 차이에 관한 견해를 개진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사(事)와 이(理)의 관계를 처리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불교이론의 심천(深淺)을 평가하고 있었다. 사(事)를 얼마나 철저하게 본성(理)대로 이해하고 경험하는가를 그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볼 수 있겠다. 의상에 의하면 화엄인 일승의 이론(普法)이야말로 가장 완벽하고 철저하게 사(事)와 이(理)의 관계를 처리한다고 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사(事)와 이(理)가 일승에서처럼 즉(卽)과 중(中)의 관계로 무애자재하지 못하며, 사(事 자체가 온통 그대로 이(理)가 되어 급기야 사(事)와 사(事)가 무애자재한 진실성의 관계 그물로 엮여지게 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여서 삼승이 아직 이(理)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