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8권 《한마음》 - 제10장 법계도(法界圖) (7) (제8권 終)

qhrwk 2026. 5. 21. 19:36

 

제10장 법계도(法界圖) (7)

 

“얽매여 있는 중생(有情)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지요?” 도융(道融)의 질문이었다.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으면 부처를 이루었다고 이름하지 않습니다. 번뇌를 끊어 버리고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마쳐야, 이로부터 이후로 이름하여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십지경론(十地經論)에서 해탈의 자체 무애에 대해서 말씀한 것으로서, 지혜가 일어난 후 번뇌가 멸하거나(初), 지혜의 일어남과 번뇌의 멸함이 동시이거나(中), 번뇌가 멸한 후 지혜가 일어나는 것(後)등이 모두 아니고, 앞과 중간과 뒤가 연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하여, 곧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삼세 중에 끊을 것이 없지만(非初非中後), 깨닫고 나서는 삼세의 장애가 없다(前中後取故)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번뇌를 끊는가 하면 가히 허공과 같습니다. 이같이 끊으므로 아직 끊기 이전에는 ‘끊었다’고 이름하지 않으며, 지금 끊은 이후로 ‘예부터 끊었다(舊來斷)’고 이름하게 됩니다. 마치 꿈을 깸(覺)과 꿈을 꿈(夢), 잠을 잠(睡)과 잠을 깸(悟)이 같지 않은 것과 같아서, 부처가 됨과 되지 않음, 번뇌를 끊음과 끊지 않음의 차이가 생겨나는 것(猶如覺夢睡悟不同 建立成不成斷不斷)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룸(成)과 이루지 않음, 끊음과 끊지 않음 등을 내세우지만, 그 참된 도리는 모든 법의 참 모양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도는 모든 갈래를 멀리 여의었으며 열반의 모습과도 같아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 말로 설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하며, 청정한 법 가운데 한 법도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일입니다.” 의상은 대승에서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연기의 본성과 같이 끊는 것이므로, 끊지 않는 것으로 끊음을 삼는다고 말씀하였다. 즉, 끊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끊음의 ‘뜻(不斷斷)’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었다.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 에서는 ‘어느 때에 분명하게 번뇌를 끊는지 생각해 보면, 지혜가 앞에 있어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이미 없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뒤에 있어서는 번뇌를 끊을 수 없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운데도 끊을 수 없다.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시간(처음, 중간, 마지막) 모두에 끊음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끊는 것인가. 십지경론(十地經論)에서 ‘불꽃이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만이 아니고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모두 취하는 것과 같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오직 처음이나 오직 중간 등만으로는 번뇌를 끊을 수 없고 앞과 중간과 뒤가 서로 이어져서 취하여야 비로소 끊음의 뜻이 있을 수 있지만, 도리에 의거하면 예컨대 부처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번뇌의 끊음과 끊지 않음이 있지 않다. 다만 근기에 따라서 끊음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한 끊을 바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옛날부터(舊來) 깨달은 사람이 무슨 이유로 스스로 깨달음을 알지 못하는지요?” 도융이 질문을 이어갔다.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먼 옛날부터 깨달을 수 있는지요?”

“반대로 물어 보겠습니다. 꿈에서 본 호랑이는 단지 마음속의 호랑이입니까?”

“단지 마음속의 호랑이 입니다.”

“꿈을 꿀 때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무서워하다가 꿈을 깬 후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알게 되어 무서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꿈을 깬 이후에 비로소 마음속의 호랑이였습니까? 아니면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 였습니까?”

“실제로 이야기한다면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습니다.”

“꿈을 꿀 때에는 마음속의 호랑이인 것을 몰랐는데 어떻게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습니까?”

“그 사람이 비록 알지 못하였지만 실제로는 꿈을 꿀 때부터 마음속의 호랑이였습니다.”

“그대가 이미 잘 이야기 하였습니다. 비유의 대상(法)도 또한 그러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미혹되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 이야기하면 본래부터 깨닫고 있으면서 단지 알지 못할 뿐입니다.”

 

“삼승의 가르침 가운데 또한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면서도 항상 고요함이 있는데, 이와 같은 뜻을 무슨 까닭에 이치에 즉한 문에 치우치고 현상에 즉하지 않아서 자재롭지 않다고 위에서 말씀하셨는지요?” 진장(眞藏)의 질문이었다.

 

“이치와 현상이 상즉(相卽)하므로 이와 같은 뜻이 있습니다. 현상과 현상의 상즉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삼승의 가르침에서는 분별하는 병을 다스리고자 현상을 모아서 이치에 들어가는 것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별교일승에 의하면, 이치와 이치의 상즉 또한 가능하고 현상과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이치와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각각 상즉하지 않음 또한 가능합니다.

 

만약 연기의 참 모양(實相)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먼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일전(一錢)에서부터 십전(十錢)까지인데, 열(十)을 말한 까닭은 한량없음을 나타내려는 까닭입니다. 즉, 하나 가운데 열이고, 열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가 곧 열이고, 열이 곧 하나인 것입니다.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는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는 곧 열이 아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같이 변화가 생기는 것을 견주어 맞추어 보면, 낱낱의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본과 지말의 두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나머지 여덟 동전 가운데도 여기에 준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의상의 설명에 따라 십전법을 이해하면, 한 종류의 십지(十地)가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지(地)에 각기 십지가 갖춰져 있을 때에 첫 번째 지(初地)인 환희지는 하나의 현상(一事)이고 그 뒤의 여러 지에 갖춰져 있는 환희지들은 하나(一)와 여럿(多)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의 환희지를 부를 때에 뒤의 여러 지들에 있는 환희지들이 함께 ‘환희지’라고 외친다. 이구지를 부를 때에는 앞과 뒤의 여러 지에 있는 이구지들이 함께 ‘이구지’라고 외친다. 이것이 의상의 ‘온전하게 다 갖춤(盡), 즉 횡진법계(橫盡法界)와 온전하게 다 갖추지 못함(不盡)의 수진법계(竪盡法界)를 완전히 포섭한 견해이다.

 

“이미 하나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하나 가운데 열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지요?” 진장의 질문이 어어졌다.

 

“대연기의 다라니법에는 만약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곧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모양이 어떠한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란 자성(自性)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하나이며, 내지 열이란 자성으로서의 열이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열인 것입니다. 일체의 연으로 이루어지는 법은 한 법도 일정한 모양으로서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곧 자재(自在)하지 않습니다. 자재하지 않다란 생겨나지만 생겨나지 않음으로서의 생겨남입니다. 생겨나지 않음으로서의 생겨남이란 곧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 됩니다.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란 곧 중도(中道)의 뜻인 것입니다.

 

중도의 뜻이란 곧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통하여서, 용수(龍樹)가 말하기를,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곧 공하다고 설하며,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설하며, 또한 곧 중도의 뜻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이 곧 그 뜻입니다. 중도의 뜻이란 무분별의 뜻입니다. 무분별의 법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연을 따라 다함이 없으며 또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 가운데 열과, 열 가운데 하나는 서로 용납하여 걸림 없으나 상즉(相是)은 아닙니다. 이제 하나의 문 가운데 열 문을 갖추므로 하나의 문 가운데 다함없는 뜻이 있음을 밝게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의 문에서처럼 나머지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문 가운데 열을 포섭하여 다하는지요? 아니면 그렇지 아니한지요?”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면, 다함을 구하면(須) 곧 다하고, 다하지 않음을 구하면 곧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의 현상(一事)으로써 하나의 많음을 분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고, 다른 현상(異事)으로써 하나의 많음을 분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현상 가운데 하나와 많음의 뜻은 상즉(相是)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현상인 까닭에 곧 하나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이름을 외친다는 것과 모두가 스스로의 이름을 외친다는 두 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면, 하나의 현상에 들어 있는 하나와 여럿의 뜻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여럿이라는 것은 곧 모두가 스스로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고, ‘하나의 현상이므로 곧 하나이다‘라는 말씀은 모두가 하나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영관(靈觀)의 해석이었다.

 

“그렇습니다. 전체가 상즉하지만 스스로의 자리는 그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위에서 설한 것과 같은 ‘오고 감’의 뜻은 그 모양이 어떠한지요?” 영관의 질문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움직이지 않고서 항상 오고 갑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오고 감(來去)’이란 연(緣)을 따르는 뜻으로 곧 인연의 뜻이다. ‘움직이지 않음(不動)’이란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인연과 연기는 어떻게 다른지요?” 영관의 생각이 깊어 지고 있었다.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합니다. 말한 바 다르다는 뜻은, 인연이란 속제(俗諦)를 따라서 뜻이 다릅니다. 곧 인(因)과 연(緣)이 서로 바라보아 자성이 없는 뜻을 드러내니, 바로 속제의 바탕(體)이 되고, 연기란 성품을 따라 분별이 없습니다. 곧 상즉(相卽)하고 상융(相融)하여 평등의 뜻을 드러내니,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바탕(體)을 따르게 됩니다. 속제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제일의제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라고 한 것이 곧 그것입니다. 하나하나의 동전에 나아가 동시에 갖추어짐(同時具足) 등의 열 가지 문(十門)으로써 돌려 보면 그것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發心)한 보살의 일념(一念) 공덕이 다할 수 없다.’란 것이 곧 첫째 동전과 같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드러내는 까닭입니다. ‘하물며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란 둘째 동전 이후와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 발심한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란 하나의 동전이 곧 열 동전인 것과 같기 때문인 것입니다.”

 

“처음 발심한 보살이란 믿음의 지(地)의 보살이니, 곧 제자의 지위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란 부처님의 지(地)이니, 곧 대사(大師)의 지위입니다.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지위도 전혀 다릅니다. 무엇 때문에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함께 두는지요?”

 

“삼승의 방편법과 원교일승의 법은 법의 작용과 머무름이 각각 달라서 섞어 쓸 수 없습니다. 그 뜻이 어떠한가 하면, 삼승의 법은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태어난 해와 달(年月)이 같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하면 그 모양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고, 믿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원교일승의 법이란 머리와 다리가 모두 하나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태어난 해와 달이 모두 같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바로 연으로 이루어짐을 말미암은 까닭이고,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一)란 무슨 뜻인지요”

 

“하나란 하나로서 분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같다(同)란 무슨 뜻인지요?”

 

“같다란 ‘같이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분별이 없고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은 곳이며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같은 곳(同處)과 머리를 함께한다(並頭)란 무슨 뜻인지요?”

 

“같은 곳과 머리를 함께한다란 서로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이 없다란 무슨 뜻인지요?”

 

“분별이 없다란 연(緣)으로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곧 처음과 끝 등이 둘로 다름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하면 일체 연(緣)으로 생겨나는 법은 짓는 자도 없으며, 이루는 자도 없으며, 아는 자도 없습니다. 고요함과 작용함이 한 모양이고 높고 낮음이 한 맛이니, 마치 허공과 같습니다. 모든 법이 으레 예부터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법이 생겨남도 없으며 없어짐도 없으나 인연으로 있음을 관한다.’라고 한 이와 같은 등의 문장이 곧 그 뜻입니다.”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같은 곳에 머리를 함께 두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아래의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할 때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라고 하고, 또한 십지경론(十地經論)에서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육상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라고 해석한 것과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을 명확하게 압니다. ‘육상’은 위와 같으니, 이 말은 법성의 집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중요한 문이고, 다라니의 광(藏)을 여는 좋은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밝힌 것은 오직 일승다라니의 대연기법을 드러내 보인 것이며, 또한 일승의 걸림 없음을 논하여 큰 바탕(大體)을 분별한 것이니, 삼승의 영역(分際)은 아닙니다.”

 

“삼승 자체 이외에 따로 원교일승의 영역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지요?”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세계의 많은 중생(群生)들의 무리에 성문(聲聞)의 길을 구하고자 하는 자 적고, 연각(緣覺)을 구하는 자는 더욱 적으며, 대승을 구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대승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쉬우니, 이 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하고, ‘만약 중생이 하열(下劣)하여 그 마음이 싫어하는 자에게는 성문도(聲聞道)로써 보여 주어 뭇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만약 다시 어떤 중생이 모든 근기가 조금 밝고 예리하여 인연법을 좋아하면 위하여 벽지불을 설한다. 만약 어떤 이가 근기가 밝고 예리하여 큰 자비심이 있어서 중생을 이롭게(饒益) 한다면 위하여 보살도(菩薩道)를 설한다. 만약 위없는 마음이 있어서 결정코 큰일을 좋아하면 그를 위하여 부처님 몸을 보여서 다함없는 부처님의 법을 설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성스러운 말씀이 손바닥의 밝은 구슬과 같으니 놀라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상은 제자들과 법계도에 대한 개괄적인 것과 상세한 내용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공유하고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법문과 문답을 마무리하였다.

 

의상 스님께서 제자분들에게 원만한 회향을 위해 화엄경 십회향품(十廻向品)의 대목을 같이 읽기를 권하셨다.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집이 되리니, 모든 괴로운 일을 면하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구호(救護)가 되리니, 모든 번뇌에서 해탈케 하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귀의할 데가 되리니, 모든 공포를 떠나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나아갈 곳이 되리니, 일체 지혜에 이르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안락처가 되리니, 마침내 편안한 곳을 얻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광명이 되리니, 지혜의 빛을 얻어 어리석음의 어둠을 소멸하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횃불이 되리니 모든 무명의 암흑을 깨뜨리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등불이 되리니, 끝까지 청정한 곳에 머물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길잡이가 되리니, 그들의 진실한 법에 들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위하여 대도사(大導師)가 되리니, 걸림 없는 큰 지혜를 주려는 연고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모든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여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이익을 주며, 구경에는 일체 지혜를 얻게 하느니라.”

 

제자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경탄의 말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어찌 모기 발로 저 깊은 바닷속을 재려 하며, 거미줄로 수미산의 중턱에 매달려고 하겠는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에게 합장했다.

 

의상은 법문을 마치고 거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낮게 혼잣말을 이어갔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마다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글자 한 글자마다에 출현하셨습니다."

 

제8권 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