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장 법계도(法界圖) (4)
“여담으로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옛날에 법상학인(法相學人: 법상유식(法相唯識)을 공부하던 학인)이 화엄경의 대목 중에서 처음 보리심을 낼 때에 곧바로(便) 정각(正覺)을 이룬다는 말을 믿지 않고서 ‘곧바로(便)’라는 글자를 본문에서 고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을 전할 때, 후인들에 의해서 이와 같은 일들이 다시 일어날까 염려하여 글자 수를 명시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하하하”
의상은 이 법계도의 글자 수를 두고 여러 가지 말이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였는지 혹은 늘이거나 줄이는 것을 염려한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이 5천 글자로 되어 있다고 후인들이 이야기해놓은 예를 들어서 여담으로 말씀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글의 뜻을 해석(釋文意)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글에 7언(言) 30구(句)가 있습니다. 이 중에 크게 나누면 셋이 있으니, 처음 18구(句)는 자리행(自利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다음 4구(句)는 이타행(利他行)이며, 다음 8구(句)는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을 분별한 것입니다. 먼저 자리행(自利行)에 관해 말씀드리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처음 4구(句)는 증분(證分)을 나타내고, 둘째 다음 14구(句)는 연기분(緣起分)을 드러냅니다.
우선 ‘법성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융(圓融)하여 두 가지 모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거북이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인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왜 모든 존재가 본래 고요하다고 하는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없고 모습이 없어서 모든 것을 끊었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름이 없고 모습이 없어서 모든 것을 끊었으므로 본래 고요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경계를 알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지혜가 알 수 있는 경지이고 그 밖의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첫 구절은 두 극단(二邊)을 그치게 하고, 다음 구절은 움직임을 없애고, 그 다음 구절은 이름과 모습을 없애며, 마지막 구절은 깨닫지 못한 것을 없애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에 두 극단을 그치게 하는 것은 만약 진(眞)과 속(俗)의 두 가지 모습을 고집한다면 법성에는 끝내 이룰 수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와 같이 법성은 본래 진과 속, 염(染)과 정(淨) 등의 모든 상대되는 모습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법성과 진성(眞性)은 어떻게 다른지요?”
상원(相源)의 질문이었다. 그는 사영(四英) 중 한분으로서 아성(亞聖)으로 칭송받은 분이었다.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실천적으로 전파하며 상호포섭·원융(圓融) 사상을 강조, 북악·남악 화엄의 통합 기반을 닦았으며, 제자 신림(神琳)을 통해 의상 사상이 고려 화엄학(균여 등)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법성은 참됨(眞)과 허망함(妄)에 두루 통하여 원융(圓融)을 취하고, 진성은 다만 참된 존재에만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존재는 자유롭게 있으므로 인연에 따라 움직일 수 있지만 허망한 존재는 자유롭게 있지 않으므로 인연에 따라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증분(證分)에서는 참됨과 허망함에 두루 통하는 법성을 드러내고 연기분(緣起分)에서는 마음대로 있을 수 있는 진성의 뜻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의 지혜에 입각하여 사실대로 이야기한다면 차별이 없습니다.” 증분(證分)이라 함은 곧 깨달음의 영역, 경지를 가리키며, 법성(法性)의 경계이다. 의상은 이 증분 부분을 풀이하지 않음으로써 증분이 말로 설명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연기분(緣起分) 14구(句) 가운데 처음 2구(句)는 연기의 체(體)를 가리킵니다. 즉 연(緣)을 따라서 이루어진 영역인 연기분(緣起分)으로서, 바로 진성(眞性)의 경계입니다. 이 연기분은 중생을 위해 연과 상응하여 설한 것으로 ‘교분(敎分)’이라고도 합니다.”
의상은 증분과 연기분의 관계에 대해, 증분은 참모습(연기의 자체(自體))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고 연기분은 중생을 위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다르지만, 또한 연기분은 자성이 없으므로 증분과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었다.
“다음 2구(句)는 제7구(句)와 제8구(句)입니다. 다라니의 이치(理)와 작용(用)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역(攝法分齊)을 변별한 것입니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는 이 중문(中門)은 인과도리문(因果道理門)인데, 이에 입각하면 ‘이치(理)가 되고,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라는 즉문(卽門)은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인데, 이에 입각하면 작용(用)이 됩니다. 왜냐하면 중문은 만드는 주체인 원인(因)의 바깥에 만들어지는 결과(果)가 있으므로 인과도리문이고, 즉문은 인연당체(因緣當體)가 곧 공(空)하여, 그대로 원인이면서 결과이므로, 만드는 주체인 원인의 바깥에 만들어지는 결과가 없으므로 덕용자재문인 것입니다.
다음 2구(句)는 제9구(句)와 제10구(句)입니다. 구체적인 현상에 의거하여 존재들의 관계(攝法分齊)에 관한 것입니다. 사법(事法)에 즉(卽)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역을 밝힌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체를 ‘이(理)’와 ‘사(事)’의 측면으로 나눌 때, 법계의 일체 현상으로서의 ‘사(事)’가 아닙니다.”
균여의 일승법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 에서는 이 ‘사(事)’를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티끌’과 ‘시방十方’과 같은 ‘사(事)’로서 해석하고 있다.
“한 티끌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는 것 또한 다라니인데 어째서 앞의 두 구절은 다라니라고 해석하고 이 구절들은 구체적 현상에 의거하여 존재들의 관계를 구분한 것이라고 하시는 지요?”
지통(智通)의 질문이었다. 의상십철(義湘十哲) 가운데에서도 특히 문헌 전승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의상의 사상을 “들었다”는 수준을 넘어 “기록해 남긴” 인물로서, 신라 화엄학의 역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지금의 이 구절도 또한 다라니의 뜻입니다. 하지만 앞 구절은 모든 존재들을 다 대상으로 하여 곧바로 다라니를 드러낸 것이고, 이 구절의 경우는 티끌도 구체적 현상이고 시방세계도 구체적 현상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큰 것과 작은 것에 막힘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형이신 원효 스님께서는 ‘작은 것속의 큰 것이 큰 것을 포함할 수 있고, 큰 것 속의 작은 것이 작은 것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법장 스님께서는 ‘작은 것속의 큰 모습이거나 큰 것속의 작은 모습이라야 비로소 포함하거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작은 것의 작은 모습이 큰 것을 포함할 수 있고, 큰 것의 큰 모습이 작은 것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큰 것과 작은 것이 본래 하나이므로 작은 것은 작다는 성질을 없애지 않고도 작은 것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엄 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열흘 전에 학도들이 와서 안부를 묻는데, 스님께서 대중들에게 ‘경전에서 한 티끌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과 한량없는 긴 시간이 한 순간과 같다는 글에 대하여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기하는 모든 존재는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작은 것은 작은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큰 것은 큰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으며, 짦은 것은 짦은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긴 것은 긴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며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지엄 스님께서 ‘맞기는 맞지만 아직 설익은 견해이다’라고 하시며, 대중들이 다시 그 뜻을 여쭈어보자 말씀하시기를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단지 큰 것과 작은 것이 본래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것과 작은 것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어떻게 아시는요?” 지통이 다시 그 진의를 물었다.
“큰 것과 작은 것이 막힘이 없는 것은 꿈에서 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를 잊어버린 마음이 잠자는 인연을 따라서 전체가 티끌이 되고 전체가 산이 되는 것이지, 단지 일부가 티끌이 되고 전체가 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꿈을 깬 마음에서는 티끌과 산이 막힘없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사물에 대입하면 정해진 것이 없는(無住) 허공을 가리켜서 티끌이라고 하고, 정해진 것이 없는 허공을 가리켜서 시방세계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하나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일 뿐이므로 티끌은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큰 것을 포함할 수 있고 시방세계는 자신의 큰 자리를 잃지 않으면서 작은 것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의상은 그래서 큰 것과 작은 것은 막힘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었다.
“화엄경 십주품(十住品)에 ‘보살은 지극히 큰 것에 작은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고자 하여 발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작은 것에 있는 큰 뜻이 큰 것을 포용할 수 있고, 큰 것에 있는 작은 뜻이 작은 것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큰 것과 작은 것이 변하지 않고서 작은 것이 큰 것을 포용하고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지요?”
“큰 뜻일 때에도 작은 모습을 잊지 않고, 작은 뜻일 때에도 큰 모습을 잃지 않기 때문에 지극히 큰 것에 작은 모습이 있다고 이야기 한 것이지 시방세계가 티끌에 들어가기 때문에 작다고 하고, 티끌이 시방세계를 포용하기 때문에 크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에 맞게 이야기 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한 티끌에 시방세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티끌과 시방이 다 같이 자성이 없고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 그 참된 모습이어서, 티끌이 스스로 큰 모습을 갖추고 있으므로 시방세계가 티끌에 들어가려고 할 때 일부러 작은 모습으로 바꾸고 티끌이 시방세계를 포용하려고 할 때 일부러 큰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작은 것이 작은 모습을 바꾸지 않고서 큰 것을 포용할 수 있고, 큰 것이 큰 모습을 줄이지 않고서 작은 것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티끌이 크고 시방세계가 작다고도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상의 명료한 대답을 들은 지통의 고개는 절로 끄덕여졌다.
“다음 4구(句)는 제11구(句)에서부터 제14구(句) 입니다.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역을 보인 것입니다. 이 구세(九世)가 서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하나의 종합적인 시간을 이루며, 이 종합적인 시간과 개별적인 시간을 합하여 십세(十世)가 됩니다. 이는 서로 다른 것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드러나서 연기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상즉상입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뒤섞이지 않고 떨어져 따로 이룬다는 것은 앞의 구체적인 현상(事)에 의거한 것과 시간(世時)에 의거한 것 두 가지에 모두 다 해당이 되는 것인지요?” 지통의 질문이 이어졌다.
“잎서 말한 것처럼 이 구절은 시간에 의거하여 존재들의 관계(攝法分齊)를 드러낸 것이어서 구세와 십세가 서로 상즉한다는 것에만 해당이 됩니다. 십세가 별개의 존재로서 서로 다른 시간을 이루고 있다는 뜻에서 ‘떨어져 따로 이룬다(隔別成)’고 하였습니다.”
“다음 2구(句)는 제15구(句)에서 제16구(句)입니다. 여기서는 계위(位)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역을 밝힌 것입니다. 초발심(初發心)과 정각(正覺), 생사와 열반은 모두가 하나의 계위(位) 입니다. 처음 발심할 때에 곧바로 정각을 이룬다는 것은, 옛사람들의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는 입장(因中說果), 이치에 의거하면 모두 다 평등하다(約理平等)는 해석, 수행자의 경지는 부처의 경지와 같다(同佛境)는 해석들은 삼승으로써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일승의 입장에서 연기의 가르침을 따른, 시작과 끝이 다 갖춰져 있으므로 처음을 얻으면 곧 마지막을 얻고 마지막을 마치면 바로 처음이 시작된다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경각(究竟覺)인 것입니다.”
“다음 2구(句)는 제17구(句)와 제18구(句) 입니다. 이는 위의 뜻을 통틀어 논한 것입니다. 오직 연기다라니법을 나타낸 것입니다. 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 곧 일승(一乘)의 다라니법(陀羅尼法)인 것입니다. 하나가 곧 일체(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일체의 막힘과 장애 없는 법계의 법(法)인 것입니다.
지엄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연기란 위대한 성인(聖人)이 중생을 섭수하여 이치에 계합(契合)하고 사(事)를 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범부는 사(事)를 보면 곧 이치에 미혹하나, 성인은 이치를 얻어서 이미 사(事)가 없는 까닭이다. 이제 참된 이치를 들어서 미혹한 중생(情)을 깨닫게 하여,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사(事)가 곧 없으며 사(事)가 곧 이치에 들어맞음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이 가르침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십지경론(十地經論)에서 자상(自相)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과보의 상(報相)이니, 명색(名色)이 아뢰야식(阿梨耶識)과 함께 생기는 것이다. 경에서 삼계(三界)의 땅에 다시 싹이 생기니, 이른바 명색(名色)이 함께 생긴다라고 한 까닭이다. ‘명색(名色)이 함께 생긴다.’는 것은 명색(名色)이 저 아뢰야식과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둘째는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니, 이 명색(名色)이 저 아뢰야식을 여의지 않고, 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에서 ‘여의지 않는다’라고 한 까닭이다.
셋째는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니, 육입(六入)에서부터 유(有)에 이르는 것이다. 경에서 이 명색(名色)이 자라서는 육입(六入)의 무더기를 이루고 내지 유(有)의 인연인 까닭에, 태어남, 늙음, 아픔,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번뇌(生老病死憂悲苦惱)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의 무더기를 키우지만, 이 중에는 나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으니, 풀과 나무와 같다고 한 것이다.
이 중에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다는 것은 이 둘이 공(空)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다는 것은 자체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십이인연(十二因緣) 등은 곧 바탕(體)의 자성이 공(空)하여 저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생겨난다. 아뢰야식은 미세하고, 자체가 무아(無我)이며, 인연을 낳는다. 십이인연도 다 무아(無我)이니, 따라서 연(緣)으로 생겨난 것들은 별다른 법이 있지 않다. 부처님도 연기를 관하는 문(緣起觀門)을 들어서 모든 법이 다 무분별이며 곧 참된 성품을 이룸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지경론에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第一義諦)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뜻은 삼승(三乘)에 있으며, 또한 일승(一乘)에도 통한다. 왜냐하면 일승을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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