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장 법계도(法界圖) (5)
“다음 4구(句)는 제19구(句)부터 제22구(句) 입니다. 이타행(利他行)중에 나아가서,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비치니, 천제(天帝)와 아수라가 싸울 때 모든 병사들과 모든 무기들이 그 가운데에 나타나 분명히 드러남이 마치 도장으로 글자를 찍은 것(印)과 같기 때문에 ‘해인’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능히 삼매에 들어가는 것 또한 이와 같습니다. 법성(法性)을 완전히 증득하여 밑바닥이 없으므로 끝까지 청정(淸淨)하고 맑고 밝아서,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나므로 이름하여 ‘해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대집경(大集經)에서 비유컨대 염부제 중생의 몸과 그 밖의 외색(外色 : 境)들, 이와 같은 모습들이 바다에 모두 비치고 있으므로 큰 바다에 비춰진다(印)고 하였습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대해인(大海印) 삼매를 얻어서 일체중생의 마음과 행동을 보고 일체의 법문에서 모두 혜명(惠明)을 얻으며, 이것이 보살이 해인삼매를 얻어서 일체중생의 마음과 행동이 나아가는 바를 보는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삼승에서도 또한 해인(海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로 오직 화엄경에서만이 해인삼매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지요?”
제자 능인(能仁)의 질문이었다. 능인은 학가산 능인굴에서 염불 수행을 하며 화엄 사상을 실천했으며, 의상의 삼천여 제자 중 뛰어난 대덕으로, 부석사 등 화엄십찰(華嚴十刹) 건립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까닭으로 지엄 스님께서 ‘해인(海印)’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3무수겁(無數劫 : 아승기겁) 동안 수행한 제석이 법공(法空)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가 소지장(所知障) 아수라와 싸울 때에 3과(科) 100법(法)의 모습이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바다에 비치는 해인이고, 두 번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劫)동안 수행한 제석이 본각(本覺)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가 근본무명(根本無明) 아수라와 싸울 때에,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본성의 덕(性德)의 모습이 일심진여(一心眞如)의 바다에 비치는 해인이며, 세 번째는 한 마음도 일으키지 않은 제석이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가 망념(妄念) 아수라와 싸울 때에 형상을 구별하는 것을 떠나서 둘이 없는(不二) 바다에 비치는 해인이며, 네 번째는 두 부처님 세계에 있는 작은 티끌들의 수만큼 많은 겁(劫) 동안 수행한 제석이 총상(總相)의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가 변계(遍計) 아수라와 싸울 때 10종 보법(普法)의 모습이 세계의 바다에 비치는 해인이고, 다섯 번째는 십불의 제석이 법성(法性)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가 무주실상(無住實相) 아수라와 싸울 때에 3종 세간의 모습이 국토의 바다에 비치는 해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의 세 가지는 삼승의 해인이고, 뒤의 두 가지는 일승의 해인인데, 앞의 삼승의 세 가지 중에 첫 번째는 대승초교이고, 다음은 대승종교이며, 마지막은 돈교(頓敎)라 할 수 있습니다. 뒤의 일승의 두 가지 중에서 앞의 것은 외화(外化 : 가르침을 펴는 것)이고 뒤의 것은 내증(內證 : 깨달음의 경지 자체)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삼승에도 해인에 의거하여 일어난다는 뜻이 부분적으로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오직 화엄경만이 해인정(海印定)에 들어 있을 때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구(句)에서는 치성하게 솟아 나오는 것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번다하게 나타낸다(繁出)’라고 하였습니다. ‘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인 것입니다. 즉, 여의보왕(如意寶王)이 무심히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 연(緣)을 따라 끝이 없으므로, 석가여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 또한 이와 같아서, 한 소리(一音)로 펼친 것이 중생계를 따라 악을 없애고 선을 일으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 어디든 필요한 곳에 따라서 여의(如意)롭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여의’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다음 8구(句)는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을 분별한 것입니다(脩行者方便及得利益).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면, 그 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수행의 방편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이익 얻음을 분별한 것입니다. 첫째 문에서 ‘행자(行者)’란 일승(一乘)의 보법(普法)을 보고 들은 이후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를 말합니다. 이때 보법(普法)이라함은 ‘널리 두루하여 원만하지 않음이 없는 법’으로, 화엄경 여러 곳에서 널리 설해지고 있으며, 화엄교 전체를 보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엄 스님께서는 보법을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의 체(體)라고 하시면서, 별교일승(別敎一乘) 즉 화엄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효는 그의 교판에서 일승만교(一乘滿敎)의 화엄을 보법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며, 의상 또한 이 구절에서 일승보법을 별교일승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별교일승(別敎一乘)을 기준으로 하여 만약 방편일승(方便一乘)을 말하게 되면, 오승(五乘 : 三乘, 小乘, 人天乘)이 모두 일승에 들어가 포섭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일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一乘所流)이고,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一乘所目)이고, 일승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이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목표로 하는 것(所目)’은 연기의 도리를 기준으로 한 말이고, ‘방편(方便)’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입니다. 훌륭한 방편으로 중생을 가까이 이끌어 맞아들이기 때문이니, 오승의 말씀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人)과 법(法), 원인(因)과 결과(果), 앎(解)과 수행(行), 이치(理)와 현상(事), 가르침(敎)과 뜻(義) 등의 일체 모든 법도 이와 같습니다.
이른바 오승(五乘) 등의 법은 설하는 가르침(能詮敎法)인지, 설해지는 뜻(所詮義)인지가 의문이 생길 수 있으나, 설하고 설해지는 일체 모든 법은 사실은 모두 다 말(言) 가운데 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가 하면, 설해지는 법은 말의 모양(言相)은 모두 끊어졌으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큰 자비와 본래 서원의 힘으로 인한 까닭에, 그리고 모든 부처님 집의 법(法)이 으레 이러한 까닭에, 오로지 중생을 위하여 말로 된 가르침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러한 뜻 때문에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되는 일체 모든 법이 다 말(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이 단지 이름(名字)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고, 연(緣)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법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從緣所生諸法 但有名)한 것이 곧 그 뜻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만약 증분(證分)의 법에 말의 모양(言相)이 미치지 않고, 언교(言敎)의 법이 다만 현상(事) 가운데만 있다면, 증분과 교분(敎分)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되는 허물이 있게 됩니다. 즉, 만약 중생의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게 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은 예부터 중도(中道)이며 하나로서 무분별(無分別)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계(遍計)는 모양(相)이 없고 의타(依他)는 생겨남이 없으며 진실은 성품이 없어서 세 가지의 자성(自性)이 항상 중도에 있으니, 세 법 이외에 또 다시 증분과 교분이 따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로서 무분별(無分別)이니,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이 이치를 얻은 까닭에 이름의 모양(名相)이 미치지 않으나, 중생을 위하여 설하기 때문에 말이 현상(事) 중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의 게(偈)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부처님의 법을 연설하실 것이 없지만 그 교화에 응하는 바를 따라서 법을 설하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자(聖者)가 변계(遍計)를 따르는 까닭에 세 가지 자성(三性)을 세워서 우선 범부들의 궁핍한 경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중생(情)을 따라서 현상(事)을 설한 뒤, 점점 이후에 세 가지 자성이 없음(三無性)을 나타내어서 꿈꾸는 사람을 깨우니, 이것이 곧 성자의 큰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어서, 모양 없는 평등한 지혜가 곧 앞에 나타나 끝내 상대할 만한 법이 없으며, 오직 중도(中道)에 있음을 깨우치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가르침이 세워지는 이유가 그러함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자비의 방편으로 중생들의 눈병을 따르는 까닭에 허공의 꽃(空華)을 말한 것이니, 어떤 비방이나 논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의상은 의타기상(依他起相)은 인연(因緣)을 따라 생겨난 것으로 자성이 없어서 두 변의 잘못을 여의었으니 무아(無我)와 같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은 평등한 법성(法性)으로서, 이것과 저것을 원융하여 분별할 수 없으니, 고래(古來)로부터 ‘한 맛(一味)’임을 말씀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증분의 법과 연기분의 법은 어떤 차별이 있는지요?” 능인의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차별되기도 하고 차별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 뜻이 무엇인가 하면, 증분의 법은 참 모양(實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에 오직 깨달은 이만이 알 수 있고, 연기분의 법은 중생을 위해 설하여 연(緣)과 상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차별이 됩니다. 하지만 연기의 법은 뭇 연(緣)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기 때문에 결국 근본(本)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차별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하는 바의 것은 곧 지말(末)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차별인지요?”
“그 뜻도 가능합니다. 만약 깨달은 것이 말(言)에 있다고 하면, 지말(末)과 다르지 않습니다. 말이 깨달음에 있으면 근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과 다르지 않으므로 작용하면서도 항상 고요하고,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말과 다르지 않으므로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합니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므로, 말하지 않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으므로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므로 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말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둘 다 모두 없을 수 없으므로 둘이 서로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뜻 때문에 말함과 말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차별의 상대하는 법문을 여기에 준하여 알게 되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유위와 무위의 일체 모든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성품과 모양이 항상 머물러서, 변하여 달라짐이 없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또한 바르게 말한 법 중에는 말(言說) 이외에 다시 다른 뜻이 없으니, 말로써 뜻을 삼게 됩니다. 바른 뜻의 법 중에는 바른 뜻 이외에 다시 다른 말이 없으니 뜻으로써 말을 삼게 됩니다. 뜻으로써 말을 삼으므로 말은 뜻 아님이 없고, 말로써 뜻을 삼으므로 뜻은 말 아님이 없게 됩니다. 뜻이 말 아님이 없으므로 뜻은 곧 뜻이 아니고, 말이 뜻 아님이 없으므로 말은 곧 말이 아닙니다. 말이 곧 말이 아니고, 뜻이 곧 뜻이 아니므로 둘 다 모두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 중도(中道)에 있으니, 중도는 말과 말 아닌 것에 두루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참모양(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말의 법은 참된 성품(眞性)에 있지 않고 각각의 근기(機)의 이익에 있기 때문입니다. 근기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름에는 참된 성품이 없고,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으므로 이름을 붙이지만 본래 이름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름을 붙이지만 이름이 없으므로 이름으로써 참됨(實)을 구하지만 참됨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름에 참된 성품이 없으므로 이름을 붙이지만 무아(無我)와 같아서 이름의 성품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뜻 때문에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오직 증득한 자만이 알고 다른 이의 경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이고 나의 경계가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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