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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8권 《한마음》 - 제9장 법계도(法界圖) (6)

qhrwk 2026. 5. 21. 19:35

 

 

제9장 법계도(法界圖) (6)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 ‘일체법의 성품과 일체법의 모양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달라지지 않는다(一切法性 一切法相 有佛無佛 常住不異).’라고 말씀하신 대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일체법 중의 법성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무른다.(此一切法中法性 有佛無佛 法界常住)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근본과 지말이 곧 상즉(相卽)하고 상융(相融)하므로써 중도(中道)의 뜻을 드러내고,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으로써 무아(無我)의 뜻을 드러냅니다. 드러나는 도리는 다르지 않으나 설명하는 방편이 다를 뿐입니다. 이는 곧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돕고,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되어서, 중생을 깨우쳐 인도하여 자체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 교화함과 교화됨의 핵심(宗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위에서 의상이 설명한 세 가지 자성이 없음(三無性)에 대해 원효의 해심밀경(解深密經) 무자성품(無自性相品)에서는 ‘공(空)’의 의미를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상무성(相無性)이라 하여, 모든 법은 범부가 집착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가상(假相)이므로 모든 법에 고유의 상(相)이 있지 않아 상(相)에 자성이 없다고 하였고, 둘째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생무성(生無性)’이니, 연기의 제법이 모두 뭇 연에 의해 생긴 것이어서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생(生)에는 자성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며, 셋째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승의무성(勝義無性)’이니, 연기된 모든 법이 무자성(無自性)이므로 이것을 ‘승의(勝義)로서의 무자성’이라고 하였다.

 

“앞서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대로, 분별을 반대로 되돌려 무분별(無分別)을 얻는 것을 ‘연이 없다(無緣)’라고 이름한다고 말합니다. 이치에 따라서 머무르지 않음을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라고 이름합니다. 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으므로 ‘사로잡는다(捉)’라고 이름합니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간다(歸家)’하고 한 것은 바로 본성(本性)을 증득한 까닭입니다. 이때 ‘집(家)’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그늘지게 덮는다는 뜻이며,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법성(法性)의 참된 공(空)은 깨달은 이가 머무르는 곳이므로 ‘집(宅)’이라고 이름하고, 큰 자비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써 중생을 그늘지게 덮어 주는 것을 이름하여 ‘집(舍)’이라고 합니다.

 

이 뜻은 삼승에 있으나 일승이라야 비로소 구경(究竟)이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곧 법계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법계 다라니의 집과 인드라 다라니의 집과 미세 다라니의 집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자가 의지하여 머무르는 곳이므로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수를 따른다(隨分)’고 한 것은 스스로가 원만하지 않은 뜻이기 때문이며, ‘자량(資糧)’이란 보리를 돕는 덕목(助菩提分)이기 때문입니다. 지엄 스님께서는 이 보리분(菩提分)에 대해서는 소승과 삼승에서와는 달리, 일승의 보리분은 화엄 수행 계위로 볼 때 묘각(妙覺)에 해당하는 화엄경의 이세간품(二世間品) 가운데 보광명전 부처님 처소에서 보현보살이 불화엄삼매(佛華嚴三昧)에 들었다가 일어나 보혜보살(普慧菩薩)의 이백 가지 질문을 받고, 한 가지 물음에 열 가지씩 대답한 ‘이천 가지 문답’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이어서 그 ‘이익 얻음’을 말씀해보면, ‘다라니(陀羅尼)’라고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 법을 지니기(總持)’ 때문이며, 열 개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 가운데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십전법(數十錢法)’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으로, 화엄 법계를 나타내기 위해 화엄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비유인데, 비유의 경증으로서는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서 정진림보살이 읊은 ‘비유하면 열을 헤아리는 법과 같아서 하나를 더해 무량에 이르니 모두 다 본수(本數)이나 지혜인 까닭에 차별하다.’라는 이 게송에 주목하여 ‘수십법(數十法)’을 교설하고 있었다.

 

이 설을 바탕으로 의상은 연기실상다라니법을 관하기 위해서는 ‘수십전법(數十錢法)’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강조하면서 화엄의 법계연기를 설명하기 위한 동전 세는 비유를 확립시키고 있었다.

 

“실제(實際)라고 말한 이유는 법성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이며, ‘중도(中道)’라고 말한 이유는 두 변을 원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앉는다(坐床)’란 것은 바로 일체를 섭수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법계의 열 가지 열반(涅槃)의 광대한 보배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므로 ‘자리에 앉는다’라고 이름한 것이며,‘보배’라고 한 이유는 귀하기 때문이며, ‘자리(床)’란 곧 섭수하여 지니는 뜻인 까닭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모두 허깨비(幻)와 같아 얻을 수 없지만, 보살은 수승한 공덕에 의해 열반에 머무르면서 생사를 여의지 않고, 또한 생사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를 나타내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열 가지 열반’은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의 ‘여래(如來)·응공(應供)·등정각(等正覺)이 불사(佛事)를 끝까지 마치시고 열 가지 뜻이 있어서 대반열반(大般涅槃)을 나타내 보이신다.’라는 구절의 내용으로써,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체의 행이 모두 무상(無常)함을 밝히려는 뜻이며, 일체의 유위법이 편안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이고, 대반열반이 가장 안온함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밝히려는 뜻이며, 대반열반이 일체 모든 두려움을 멀리 여의었음을 밝히려는 뜻이고, 모든 천인(天人)이 색신(色身)에 탐착하기 때문에 색신이 무상하고 마멸법임을 밝혀 청정한 법신에 항상 머무르기를 구하게 하려는 뜻이며, 무상(無常)의 힘은 강해서 되돌릴 수 없음을 밝히려는 뜻이고, 유위법은 좋아하는 대로 행해지지 않으며 자재롭지 못함을 밝히려는 뜻이며, 삼계의 법이 모두 질그릇과 같아 견고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이고 대반열반이 최고의 진실이며 무너지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이며, 대반열반이 생사(生死)를 멀리 여의어 일어나지도 멸하지도 않음을 밝히려는 뜻입니다.”

 

이 열 가지 열반설은 이후 화엄가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었는데, 열반을 소승의 열반, 삼승의 열반, 일승의 열반으로 나눈 뒤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의 열 가지 열반이 일승 중 별교(別敎)의 열반으로 해석하였다.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다(舊來不動)’란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곧 열 부처님(十佛)이니 화엄경과 같습니다. 지엄 스님은 이를 종합하여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을 근거로 하는 ‘행경(行境)’과 십지품(十地品) 제8지에 바탕한 ‘해경(解境)’의 ‘이종십불설(二種十佛說)’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나의 오척되는 몸을 이름하여 세간이라 하고, 이 몸이 허공 법계에 두루하여 이르지 못함이 없는 까닭에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합니다. 세간에 안주하므로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생사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고 하여,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세 가지 세간이 원만히 밝고 자재하므로 무착불이라 합니다.

 

둘째는 ‘원불(願佛)’이니,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처님은 머무름 없음(無住)을 몸으로 삼기 때문에 어느 한 물건도 부처님의 몸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른바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체를 다 포섭하여 법계에 두루 칭합함을 이름하여 원불이라 합니다. 셋째는 ‘업보불(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법이 본래 움직이지 않으며 원만히 밝게 비춘다는 것을 만약 모든 수행하는 사람이 믿을 수 있으면 곧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실제 도리를 들어서 말하면 위로는 묘각(妙覺)에서부터 아래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의 일이니, 이로써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일을 공경하고 믿으면 업보불이라 말할 것입니다. 넷째는 ‘지불(持佛)’이니, 따라 주기 때문입니다. 법계의 삼라만상 모든 법이 비록 다함이 없더라도 만약 해인으로 도장 찍듯 정한다면 곧 오직 하나의 해인삼매의 법일 뿐인데 저것은 나를 지니고, 나는 저것을 지니는 까닭에 수순한다고 하고 그러므로 세계로써 부처님을 지니고, 부처님으로 세계를 지니니, 이를 이름하여 지불이라고 합니다. 다섯째는 ‘화불(化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입니다. 열반불(涅槃佛)이라고도 합니다만, 삶과 죽음과 열반이 본래 평등함을 증득하여 보는 까닭에 영원히 건너갔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삶과 죽음이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열반이 적정한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티끌법계, 소나무법계, 밤나무법계 내지 시방삼세의 허공법계가 모두 부처님의 몸입니다. 이른바 진여가 과거에 없어지지 않으며 미래에 생겨나지 않으며 현재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여래 또한 그러하여 과거에 없어짐이 없고, 미래에 생겨남이 없으며, 현재에 움직임이 없습니다.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어 허공계와 같으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백천만겁 동안 이미 설했고 지금도 설하고 앞으로도 설하겠지만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법계불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쉬면 곧 부처님이고 마음을 일으키면 곧 부처님이 아닙니다. 마치 사람이 물로 그릇을 깨끗하게 하나 흐린 물을 깨끗하게 할 줄 모르니, 물이 맑으면 그림자가 밝고 물이 흐리면 그림자가 어두운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법 또한 그러하여 마음을 쉬면 법계가 원만히 밝고 마음을 일으키면 법계가 차별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면 곧 법계의 모든 법이 나의 오척신에 나타나게 됩니다.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기 때문입니다. 해인삼매의 법이 의거하는 것마다,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마다 머물러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집착 없는 삼매불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아홉째는 ‘성불(性佛)’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성에 둘이 있습니다. 이른바 큰 성품(大性)과 작은 성품(小性)입니다. 만약 한 법이 일어나면 삼세에 안도 없고 밖도 없기 때문에 큰 성품이라고 합니다. 한 법의 지위가 일체에 두루 한 가운데 바야흐로 이루어지는 것을 작은 성품이라고 합니다. 비유하면 이른바 한 기둥이 법계의 경계를 모두 나타내니 단지 이 기둥을 이름하여 큰 성품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의 기둥 가운데 서까래와 들보와 기와 등의 모든 지위가 나타나는 것을 이름하여 작은 성품이라고 합니다.

 

열째는 ‘여의불(如意佛)’이니, 두루 덮기 때문입니다. 마치 대용왕에게 대보왕(大寶王)이 있으니, 만약 이 보배가 없으면 일체중생이 입고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 가지 곡식과 아홉 가지 곡식,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이 보배왕의 덕인 것과 같습니다. 여의불의 은혜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열 개의 수로 말씀하는가 하면 많은 부처님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입니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 구경의 오묘한 핵심(宗)이어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