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십지계위(十地階位)
소백산 능선을 타고 내려온 새벽안개가 대웅전 앞마당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고요 속에서, 지통(智通)은 정성스럽게 향로를 받쳐 들고 법좌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의 손끝에 머물던 향취가 서늘한 대기를 가르자, 가느다란 향연(香煙)이 마치 길을 잃은 구름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촛불의 떨림 아래 두 손을 모으고, 간밤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번잡한 생각들을 하나둘 거두어들였다. 머릿속엔 여전히 마지막 경구인 ‘심일연중(心一緣中), 만법귀진(萬法歸眞)’의 글자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만 가지 법이 결국 하나의 진리로 돌아간다면, 지금 내 손목을 적시는 이 안개조차 결국 찰나의 환영에 불과한 것인가. 그때였다. 적막을 깨고 낮은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등 뒤로 두른 채, 의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 위를 딛는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고, 그 뒤로 흐르는 자비의 안색은 소백산의 정기만큼이나 깊고 그윽했다. 안개는 걷히고, 이제 진리의 법(法)이 찬란하게 피어날 차례였다.
“불상과 탑을 돌 때 모두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어떤 뜻이 있는지요?” 가벼운 질문으로 문답이 시작 되었다.
“재미있는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선재동자가 묘월(妙月) 장자에게 ‘성자께서는 반야바라밀의 말씀을 듣고서 깨달음을 나투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일체 존재의 진실한 본질을 보아야 깨달음을 나투기 때문이다’고 대답하였다. 선재동자가 ‘어찌 들어서 생긴 지혜와 사유해서 생긴 지혜의 성품이 통하지 않고 단지 진여를 보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장자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만일 듣거나 생각하여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면 그러한 일은 없다.
선남자여, 내가 이것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할테니 그대는 자세히 들어 보아라. 샘과 우물이 없는 큰 사막에서 봄과 여름의 뜨거운 때에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가는데 동쪽에서 오는 젊은 남자를 만나자 곧바로 <내가 지금 덥고 목마른데 어느 곳에 물과 시원한 나무 그늘이 있습니까. 나는 그곳에서 마시고 씻고 쉬면서 더위와 갈증을 없애고 싶습니다.> 라고 물었다. 그 젊은 남자는 잘 알고 잘 이야기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하나는 왼쪽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마땅히 오른쪽 길을 따라 열심히 가면 반드시 천정소(泉井所)와 비청음(庇淸陰)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덥고 목마른 사람이 비록 이와 같이 샘과 나무가 있는 곳의 이름을 듣고서 그곳에 가려고 생각하였다고 하여서 더위와 목마름을 없애고 시원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선재동자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그 샘과 연못에 이르러 목욕하고 물을 마셔야만 비로소 더위와 목마름을 없애고 시원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보살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듣고 사유하여 아는 지혜만으로는 모든 법문(法門)을 깨달을 수 없다.
선남자여, 사막은 생사를 가리킨 것이고, 서쪽에서 온 사람은 여러 중생들을 가리킨다. 더위는 많은 번뇌이며, 목마름은 탐욕과 애착이다. 동쪽에서 온 길을 아는 대장부는 곧 일체법을 아는 지혜(一切智)에 머무르시면서 존재의 참된 본성과 평등하고 참된 뜻을 얻은 부처님과 보살이다. 시원한 물을 얻어 더위와 갈증이 없게 되는 것은 곧 ‘스스로’ 진실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경전에서는 왼쪽은 잘못된 길로서 생사를 향하고 오른쪽이 바른길로서 이것이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이 가리키는 길이라고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이런 뜻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법계도의 반시(槃詩)를 읽는 방향도 역시 그러한 뜻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의상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었다.
“십지(十地)에서 5승(五乘)을 배당한 뜻은 왜 그러한 것인지요?”
“삼승의 가르침에 의탁하여 일승에 대한 신해(信解)를 내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위계(位地) 중에서 십지(十地)가 법성(法性)을 확실히 깨닫는 곳이기 떄문에 이에 의거하여 보법(普法)의 무진십지(無盡十地)에 모든 오승(五乘)과 삼승 등의 법이 갖추어져 있어 여기에 없는 것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러한 설을 제시한 것입니다.”
의상은 화엄의 보법(普法) 십지(十地)에 모든 오승(五乘)과 삼승(三乘)의 수행과 과덕(果德)이 다 들어 있음을 이야기하고 아울러 보살이 사물을 이해하는 열 가지 차원의 진리인 십종(十種) 사제(四諦)와 열 가지 인(忍)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십지(十地)와 오승(五乘)의 배대가 되는 모습은 어떠한지요?”
“초지(初地)는 인승(人乘)에 해당하고 제2지는 욕계천(欲界天)에 해당하고 제3지는 그 위의 색계와 무색계 두 천계(天界)에 해당되니, 이 세 지(地)의 수행은 세간의 수행에 배당이 됩니다.
왜냐하면 초지 등은 보시(檀)를 행하는 지로서 전륜성왕이 인간세계에서 보시를 닦는 것과 비슷하고 제2지의 지계(戒), 제3지의 선정(定) 등은 여러 천상세계의 수행과 비슷하여 그 수행의 모습이 세간과 같으므로 그렇게 배당하였습니다.
제4지의 도품(道品)과 제5지의 사제(四諦)등의 수행의 그 모습이 성문의 수행하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 두 가지의 모습은 성문과 같습니다. 제6지의 십이인연관(十二因緣觀)은 연각(緣覺)이 수행하는 인연의 수행 모습과 비슷하므로 모습이 연각과 같습니다. 제7지에서 수행하는 원행(遠行) 등의 열 가지 방편은 이승(二乘)과 비슷하지 않으므로 삼승 중의 대승이 됩니다.
오직 제8지 이상에서는 힘쓰는 마음(功用) 없이 법의 흐름에 따라 익숙해져 근기와 수행이 이루어지므로 일승(一乘)의 위(位)에 배당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의 인과(因果)는 다 처음 세 지에 있고, 모든 이승이 닦는 인과의 행법(行法)은 다 제4지에서 제6지에 있고 모든 삼승 중의 대승이 수행하는 인과의 행법은 모두 제8지 이상에 있게 됩니다. 이 문에 의한다면 오승 각각은 ‘서로 섞이지 않고’ 자신의 위계에 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의 입장에서는 모든 존재가 다 부처가 아닌 것이 없으므로, 부처가 교화하는 중생은 곧 불지(佛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세계와 천상세계 등은 어째서 처음의 세 지에만 있는지요?”
“실제로는 인간세계와 천상세계 모두 여러 지에 있습니다. 어느 곳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보살이 닦는 수행이 드러난 곳을 따라 배당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설한 의도는 바로 삼승의 위계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을 근기를 성숙시켜 일승(一乘)의 보법(普法)에 들어가게 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법(普法)에서는 어느 단계를 수행의 시작으로 삼고 있는지요?”
“하나의 법문을 얻는 것을 시작으로 합니다. 이 시작은 곧 마지막과 차이가 없는 시작입니다.”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의 수위분(受位分)에서 설명하는 수직(授職), 즉 수행을 마치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은 삼승의 수행자의 실행(實行)인지요, 아니면 일승 수행자가 실행하여 위계를 밟는 모습인지요?”
“삼승 수행자의 실행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승 수행자의 실행도 아닙니다. 이것은 삼승 위계의 모습에 의거하여, 일승의 무진십지(無盡十地)의 꼭대기에서 위계를 받는 뜻을 드러내 보여 준 것이므로 동교(同敎)의 모습에 포함이 됩니다.”
“그렇다면 일승의 바른 수직(授職)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일승(一乘)의 실행이 아닌지요?”
“일승(一乘)의 실행은 십불(十佛)앞의 보현보살의 경지로 위계(位)로 말하면 위계가 아닌 것이 없고 실천(行)으로 말하면 실천이 아닌 것이 없어서 허공 법계의 모든 법문에서 법대로 이루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화엄경의 뒷부분의 보살의 신력(神力)을 부처의 신력에 상대하여 비교하는 곳에서의 대지(大地)와 한 덩어리의 흙(塊土)을 비교하고 사천하와 그 일부의 땅을 이렇게 비교한 것으로 곧 일승(一乘)의 실행을 이렇게 보여준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끝이 없는 곳은 보여서 말할 수 없으므로 그 다함이 없는 십지의 꼭대기 모습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입니다.”
“일승의 무진십지(無盡十地)의 완성된 모습은 어떠한지요?”
“화엄경의 뒷부분인 입법계품(入法界品) 마지막에서 선재동자가 금강장도량(金剛藏道場)의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찾아가서 보현지식(普賢知識)에 관해 질문한 부분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방세계의 모든 작은 티끌마다 여러 부처님의 큰 모임이 있고 그 속에서 여러 부처님이 각기 대중을 거느리고 설법하고 있으며 그 여러 부처님 앞마다 보현보살이 있어서 각각의 부처님이 발산하는 광명을 받는 등의 일이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티끌마다 이러한 일이 있으니 이것이 무진십지(無盡十地)의 완성된 모습으로 그 크기는 법계와 같고 그 숫자는 허공계와 같으며 십세와 구세, 모든 시간에 미치지 않음이 없습니다. 화엄경의 십지품(十地品)에서는 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구삼매(離垢三昧)에 의지하여 권속의 꽃을 갖춘 큰 연꽃 등을 드러내, 열 곳에서 광명을 발산하는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보여준 모습을 앞의 보현지식 부분에서 밝힌 모습과 비교하면 시방세계 대지(大地)와 한 덩어리의 흙과 같아 비교할 수 없으니, 나누어지지 않은 것을 부분과 비교하여 뛰어남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비교하는 것이 삼승교에서 설명하는 등각과 묘각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승교에서 설명하는 등각과 묘각은 둘 다 비추고 끊음 등의 모든 일은 다 같지만 밝음과 어두움, 자재함과 자재하지 않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십인(十忍)의 행상(行相)은 어떠한지요?”
“깊은 법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수순음성인(隨順音聲忍)입니다. 진실한 생겨남이 없는 생겨남(無生生)의 이치를 이해하여 확실한 인가(印可)를 냈지만, 아직 마치지 않은 때가 순인(順忍)입니다. 이미 깨달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는 때가 무생인(無生忍)입니다. 뒤의 일곱 가지 인은 차례대로 의심을 없애면서 세우게 됩니다. 즉, ‘일체가 생겨남이 없다면 어떻게 현재 보는 것이 있는가’라고 의심하므로 이 의심에 대하여 ‘환(幻)과 같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환법(幻法)은 전혀 생겨남이 없고 실법(實法)은 불가득(不可得)이지만 현재의 ‘봄’이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존재가 환과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의심하여 ‘환법은 식(識)을 낼 수 없는데 세상의 존재가 환법이라면 어떻게 지각할 수가 있는가?’라고 하므로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하여 ‘신기루와 같다’고 말합니다. 신기루는 물기가 전혀 없지만 물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제법도 이와 같습니다. 다시 의심하여 ‘신기루는 느낄 수 없지만 세상의 존재는 느낄 수 있다. 어째서 세상의 존재가 없다고 하는가?’라고 하면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하여 ‘꿈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꿈속 존재는 전혀 없는 것이지만 꿈속에서 모두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존재도 이와 같아서 실제로는 없지만, 망상의 꿈이어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시 의심하여 ‘꿈은 깨어 있을 때는 전혀 없지만, 세상의 존재는 그렇지 않아 깨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어째서 없다고 하는가?’ 라고 하므로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하여 ‘메아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메아리는 잡을 수는 없지만, 현실에서 들을 수는 있습니다. 세상의 존재도 이와 같아서 전혀 잡을 수 없지만, 인연을 따라 현실에 존재합니다. 다시 의심하여 ‘메아리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 이익이 없지만, 세상의 존재는 그렇지 않아 사람에게 실제로 이익이 됩니다. 어떻게 메아리와 같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하므로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하여 ‘번갯불과 같다’고 말합니다.
번갯불은 잡을 수는 없지만, 사물을 비춰 사람들이 이익을 얻게 합니다. 세상의 존재도 이와 같아서 잡을 수 없지만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다시 의심하여 ‘번개는 비추는 작용이 있으니 실법이 아닌가?’라고 하므로 이 의심에 답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化)과 같다’고 합니다. 만들어진 존재(化法)는 작용이 있지만, 실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존재도 이와 같으니 어찌 실법이겠습니까? 다시 의심하여 ‘일체의 존재는 만든 사람이 없는데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라고 하므로 이 의심에 답하여 ‘허공과 같다’고 말합니다.
허공은 모든 색법(色法)을 만들지만(化), 그 허공의 체(體)는 불가득(不可得)인데 일체의 존재도 이와 같아서 실체가 공(空)하여 불가득(不可得)이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어 허공과 같습니다. 보살은 이렇게 하여 무생인(無生忍) 등을 얻으므로 그 봄은 환(幻)과 같고 허공과 같으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항상 중도실상(中道實相)에 머물게 됩니다. 인연이 없는 사람들에게 까지 자비를 베풀므로 생사(生死)를 버리지 않으면서 적멸(寂滅)에도 머물지 않고 항상 불법을 닦으면서 중생에게 이익이 되게 합니다. 이것은 곧 십지보살(十地菩薩)이 마음을 쓰는 덕용(德用)을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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