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9권 《화엄경문답》 - 제7장 본유(本有), 신생(新生)

qhrwk 2026. 5. 24. 06:04

 

제7장 본유(本有), 신생(新生)

 

지엄이 제기한 성기론(性起論)은 그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정문(淨門)에서 설정된 본유(本有)및 본유수생(本有修生)에 상응하여 구성된 것이다. 특히 그 이론이 지니는 실천적 의도를 고려한다면 성기(性起)에서도 특히 ‘기(起)’에 성기사상(性起思想)의 특징과 무게가 실리게 된다. 따라서 기(起)와 상응하는 본유수생(本有修生)을 특히 주목하게 된다. 의상은 이에 대한 관심을 ‘본유(本有)와 신생(新生)’의 문제로 표현하고 있었다.

 

“화엄경에서 ‘설산(雪山)에서 나무의 싹 등이 생겨날 때 염부제(閻浮提)의 일체 나무들이 모두 동시에 싹 등이 나니, 이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의 나무의 싹 등이 날 때 모든 보살의 싹 등이 난다’ 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무엇인지요?”

“이 뜻은 본유(本有)와 신생(新生)이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는 보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의 마음(一心) 가운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 생겨나는 보리심(新生菩提心) 등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본래 가지고 있던 보리심(本有菩提心) 등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본래 가지고 있던 행덕(本有行德)에 말미암지 않고 새로이 생겨나는 행덕(新生行德)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무엇으로 된 나무인지요?”

“대연기(大緣起)로 된 나무입니다.”

 

“앞에서 대연기로 된 나무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곧 일체 중생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니, 만약 그렇다면 또한 한 중생이 발심(發心)하였을 때에 일체중생도 발심(發心)하는 것도 가능한 것인지요?”

“이미 대연기로 된 나무이니 일체중생이 곧 한 중생이고 한 중생이 곧 일체중생이니, 곧 중생이 이미 그러할진대 기행(起行)이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서 글이 나타내는 것은 단지 본유(本有)와 신생(新生)이 동시에 함께 생겨난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니, 본(本)은 곧 부처요 신(新)은 곧 보살 등입니다.”

 

“만약 대연기로 된 나무라면 육도(六道) 가운데 두루 있을 것인데 무슨 이유로 지옥과 이승(二乘)의 열반 등에서는 생겨나지 않는지요?”

“근본(根本)에 의거해 보면 육도에 모두 있는 것이나 행위와 작용(行用)에 의거하였으므로 제외한 것입니다.”

 

“만약 행위와 작용(行用)에 의거한다면, 이승(二乘) 등에도 행위와 작용(行用)이 있는데 어째서 생겨나지 않는지요?”

“행위와 작용(行用)에 의거하는 데에는 향배(向背)가 있기 때문에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연기로 된 나무 가운데에야 무슨 행함이 있겠습니까.”

 

“향배(向背)라는 것이 무엇인지요?”

“만약 능히 스스로 자신의 성기법(性起法)을 안다면 이것을 ‘향함(向)’이라 부르고, 자신의 성기보리(性起菩提)를 모른다면 이것을 ‘등짐(背)’이라 부릅니다. 이러한 뜻에 의거한다면 단지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는 것을 ‘싹이 남(芽生)’이라 부르고,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지 않는 것은 등짐(背)이 되니 ‘싹이 남(芽生)’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지옥이나 이승(二乘)의 열반 등은 영원히 자신의 성기법(性起法)을 모르기 때문에 싹을 내지 못합니다. 사람이나 천신들 가운데 능히 이와 같이 아는 자는 따름(順)이 되니 ‘싹을 낸다(芽生)’ 등으로 부르고, 만약 이와 같이 알지 못하는 자는 싹을 내지 못합니다. 또 비록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도 과약(果藥) 등이 있는 자는 이승인(二乘人)과 같은 것이 되니, 생겨났을 때의 행덕(行德) 가운데 들어가 마음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돌이키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성기(性起)의 과약(果藥)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

“비록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였지만, 법(法)에 의거해 볼 때는 성기(性起)의 일어남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얻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일체의 악업 및 지옥 등에도 과(果)가 모두 있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지옥 등에는 과(果)가 없는지요?”

“진실에 의거한다면, 일체의 좋고 나쁜 법들이 성기법(性起法)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나, 선(善)한 행상(行相)에 의거하여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지옥 등에서는 선한 행상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엄 스님은 본유수생(本有修生)을 설명하시면서 ‘인연(因緣)에 의거하여 새롭게 생겨난 지(智)는 본래의 진실성(理)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수생(修生)은 곧 본유(本有)를 따르며 성(性)과 동일하면서 발(發)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본유(本有)와 수생(修生)의 이러한 관계를 ‘다르지 않음(不異)’이라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불이(不二)의 근거를 일심(一心)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본유(本有)와 신생(新生) 모두가 일심(一心) 안에 있으면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유(本有)와 신생(新生)의 불이(不二) 관계를 이론적으로 밝히기 위해 본유보리심(本有菩提心)과 신생보리심(新生菩提心), 본유행덕(本有行德)과 신생행덕(新生行德) 등의 말씀을 하시면서 양자를 서로 ‘비롯됨(由)’의 관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즉불(本卽佛) 신즉보살(新卽菩薩)’이라 하여 본유(本有)와 신생(新生)의 실천적 맥락을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향배론(向背論)’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無上菩提心)을 내어 마침내 스스로 자신 안에서 본래의 진실성(性起法)에 눈뜨는 것은 성기(性起)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므로 ‘향함(向)’이라 하고, 반대로 궁극적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성에 눈뜨지 못하는 것은 성기(性起)를 등지는 것이므로 ‘등짐(背)’이라 부르고 있었다. 의상의 성기사상(性起思想)은 어디까지나 보리심(菩提心)을 매개로 한 수행을 통해, 본래의 진실성에 계합하려는 실천적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었다.

 

“화엄경이 이상적 수행자로 제시하는 보살(菩薩)은 자기의 구제와 중생의 구제를 동시에 진행하는 자입니다. 특히 그 어느 경전보다도 간절하고 장대한 중생 구제의 원(願)을 실천하는 보살행(菩薩行)을 부각하고 있는 화엄경에 있어서 보살의 자기 구제는 곧 대비(大悲)의 이타행(利他行)과 직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구제와 중생 구제의 본질적 결합(自利卽利他)을 장엄하게 구현하는 것이 바로 화엄보살(華嚴菩薩)입니다. 따라서 성기론(性起論) 역시 중생 구제의 문제와 연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연기(緣起)를 성기(性起)로 파악하게 된 자, 연(緣)에 의거하여 보리심(菩提心)을 통해 본래의 진실성에 계합하게 된 자, 그리하여 여래(如來)가 된 자는, 성기적(性起的) 진실을 마땅히 중생 구제와 관련시키게 됩니다.”

의상은 성기론(性起論)의 취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었다.

 

“몰래 도움이 되는 문(潛用資成門)에 대하여 화엄경에서는 ‘여래성기(如來性起)의 광명이 사견(邪見)을 지닌 중생을 이익 하게 하나 눈먼 중생은 그것을 모르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는데, 그 사견(邪見)을 지닌 중생은 진리를 크게 위배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익을 얻는지요, 그 당시에 이익을 얻는 것인지요, 아니면 이후에 이익을 얻는 것인지요?”

“두 때에 모두 이익이 됩니다.”

 

“후에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 사견(邪見) 중생 당시에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어떤 뜻인지요?”

“비록 사견(邪見)의 성질로 이치에 어긋나는 중생이지만 곧 그도 성기(性起)의 자애(慈愛 : 性起慈)를 입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과보(果報)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몸과 마음의 과보는 성기(性起)의 은혜가 없으면 그러한 과보(果報)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자애(慈)이니, 일체 중생들이 알 수 없는 자애(慈)입니다.”

 

“중생의 괴로운 과보(苦果)는 중생 자신의 나쁜 마음의 업이 불러온 것인데 어찌하여 부처님의 자애(慈)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 하는지요?”

“중생의 모든 고통은 단지 여래장불(如來藏佛)만이 지은 것이니, 그 외의 중생의 괴로운 과보를 지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승만경(勝鬘經)에서는 ‘여래장법(如來藏法)이 중생의 괴로움을 심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체 중생의 여래장(如來藏)이 만든 것인데 어떻게 부처님의 자애(慈)가 되는지요?”

“이미 전체의 여래장(如來藏)이 짓고 그 여래장이 훈습(熏習)하여 비로소 고통을 떠나 낙과(樂果)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애(慈)의 깊고 깊음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익이 된다는 뜻은 그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중생이 고통을 받는 것이 어떻게 부처님의 자애(慈)가 되는 것인지요?”

“만약 부처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지 않게 한다면, 그 중생은 고통을 싫어하고 낙(樂)을 구하는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통을 받게 하였으므로 비로소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인해 중생이 고통을 받는 것은 곧 부처님의 자애(慈) 때문에 받게 한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래장(如來藏) 및 종교(終敎) 등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고, 만약 일승(一乘)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바로 성기법(性起法)이 지은 것이 됩니다.”

 

의상은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켜 얻은 무분별지(無分別智)로써 본래의 진실성에 계합하여 연기(緣起)를 성기(性起)로 보게 된 자는 중생을 향한 자애(慈)의 마음을 끝없이 펼친다고 말씀하고 있었다. 흡사 햇빛이 만물을 차별 없이 두루 이익되게 하듯이, 성기(性起)의 자비광명(慈悲光明)은 중생이 진리를 외면하건 외면하지 않건 간에 차별 없이 두루 비추며, 때로는 말과 행동으로, 갖가지 방식 등을 통해 자애심(慈)을 펼친다는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