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고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 에고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에고는 마음의 투영에 불과하다.
뱀이 밧줄에 투영된 것처럼 에고는 존재에 투영된 것이다.
그대는 밧줄인 줄 모르기에 뱀인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모르기에 ‘에고’라고 아는 것이다.
에고는 그대의 내적 ‘존재’를 모른다.
그대의 내적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에고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떨쳐버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에고를 떨쳐버리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들이 성공한다는 게 더 기적적이다!
그들은 겸손해진다.
하지만 겸손함은 에고의 또 다른 술수이다.
아주 교묘한 술책이다.
에고가 아무도 모르게 뒷문으로 슬쩍 들어온 것이다.
에고를 떨쳐버린다는 것은 그대가 에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는 다시 등장하기 마련이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거의 성자와 같은 매우 유명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가 매우 겸손하다고 말하곤 했다.
드디어 그가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내 발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는 당신 발바닥의 티끌에 불과합니다.”
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과 코는 뭔가 다른 걸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신은 정말로 내 발바닥의 티끌에 불과하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요?”
그는 몹시 화를 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당신 말에 동의하고 있는 것뿐이다! 내 자신이 말을 지어낸 건 없다! 당신이 시작한 말이고
나는 동의했을 뿐인데 왜 짜증을 내는 것인가?”
내가 말을 이어갔다.
“이제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서 핵심을 보라! 이것은 당신의 에고가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에고는 존재하지만, 이제 그것은 위아래가 바뀌었다.
물구나무를 서 있다. 하지만 역시 똑같은 에고이다. 이제 에고가 겸손한 척을 하고 있다.”
크리스천 수도사 세 명이 길에서 만났다. 한 명이 말했다.
“학문에 관한 한, 우리 종파가 가장 학문적으로 높고 철학적으로도 우수하지요.
신학이론에 관한 한 우리와 경쟁할 수 있는 곳은 아무도 없소이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당신 말이 옳아요. 하지만 금욕주의 실천에 있어서는 우리 종파가 가장 뛰어납니다.”
그러자 세 번째 수도사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 모두 옳아요. 하지만 겸손함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종파가 최고입니다!”
이런 겸손함이란 정말...
“우리가 최고야!”
겸손함마저 똑같은 장난을 친다.
부디 그대의 에고를 떨쳐버리려 하지 말라!
그저 그것을 이해하고 자각하라.
자각이라는 빛을 가져다대고 지켜보라.
그러면 에고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면 떨쳐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걸 떨쳐버리려 하지 말라!
그것을 떨쳐버리면, 에고는 다른 형태로 다시 등장할 것이다.
결코 그대를 떠나지 못한다.
에고란 무의식적인 마음이 오랫동안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쇼의 <사랑의 연금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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