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붓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는 강가에 자신의 숙소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양쪽에서 군대가 서있었다.
강을 경계로 두 왕국이 대치하며 누가 강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수백 년 동안 싸워왔다.
물은 소중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강물이 피로 물든 것이 여러 차례요,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
붓다는 그곳에 숙소를 두고 있었고, 양 진영의 장군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우연히 그들이 동시에 붓다의 숙소에 들어오며 서로 마주쳤다.
그들은 이 기이한 우연에 놀랐지만,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붓다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 양쪽 모두 함께 온 것은 좋은 일이다. 그대들 모두 눈이 멀었고, 그대들의 선조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은 계속 흘러가지만 그대들은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있다.
이 단순한 사실을 그대들을 볼 수 없단 말인가?
그대들은 모두 강을 원하고 있고, 강은 충분히 넓다.
강을 소유할 필요가 굳이 없다.
과연 누가 강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강은 바다로 흘러간다!
왜 양쪽 모두 그것을 이용할 수 없는 것인가?
한쪽은 이쪽 왕국에, 다른 쪽은 저쪽 왕국에 속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강에 선을 그을 필요도 없다.
물에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강을 두고 싸우지 말고 그냥 양쪽 모두 그 물을 이용하라.”
아주 간단한 해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논밭과 작물을 돌보지 않아서 농사를 모두 망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강을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결정할 싸움이 우선이었다.
우선 강을 소유해야만 논밭에 물을 댈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오직 소유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통찰을 가진 사람은 활용에 대해 생각한다.
붓다는 말했다.
“그것을 이용하라! 그리고 그 물을 모두 이용하고 나면 나를 다시 찾아와라. 그때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다시 보자. 하지만 그대들이 강물을 모두 사용하고 난 뒤에만 나를 다시 찾아오라.”
그 물은 2천5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 물을 어떻게 모두 써버릴 수 있단 말인가?
수백 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큰 강이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에서 생긴 물은 벵골 만灣으로 흘러간다.
그 물을 과연 어떻게 모두 써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시의 그 왕국들은 규모가 작은 소왕국이었다. 그 강물을 모두 써버리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직관의 인간으로부터 통찰이 나온다.
그러나 그 통찰은 오직 지성인에게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그때 그 지성인은 오직 권력을 욕망으로 둔 직관의 정치인을 도울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실력주의meritocracy라고 부르는 바이다.
궁극의 실력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가장 낮은 단계에 영향을 미치며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도록 돕기 때문이다.
거기엔 아무런 기득권이 없다.
아무런 기득권이 없이 자유로우며 그 통찰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직관의 인간이 본능적인 사람에게 무언가를 설명해주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서 지성의 인간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대학과 학교들은 정치학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정치학만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정치학뿐만 하니라 정치술을 가르쳐야 한다.
학문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실용적인 정치학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대학 교수들은 정치인에게 특정한 자질을 가르치고 준비시켜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지면, 현재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잘 훈련되고 문명화되어 정치의 기술과 학문을 아는 통치차들, 그리고 어제든지 교수와 학자들을
찾아갈 준비가 된 통치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서서히 실력주의의 가장 높은 차원에 접근하여 직관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해지면,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으로 인간적인 무엇,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으로의 통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상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얻게 될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폭민정치mobocracy에 불과하다.
오쇼의 <권력이란 무엇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