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린 꼬마가 학교에서 질문을 받았다.
“너는 성경을 들여다본 적이 있니?”
꼬마가 대답했다.
“여러 번 봤죠.”
선생이 물었다.
“그럼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말해볼 수 있니?”
꼬마가 대답했다.
“그럼요, 전부 다 말할 수 있죠.”
선생은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전부 다 말할 수 있다고?”
꼬마가 말했다.
“그럼요. 저희 엄마는 아빠의 머리털을 그 안에 보관하거든요.”
선생이 물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니?”
꼬마가 말했다.
“아니요. 살아 계세요.
하지만 아빠 머리털이 다 빠졌어요.
대머리가 되셨는데, 젊은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 그 머리털이거든요.
게다가 누나는 남자친구의 편지를 그 안에 모아두어요.
그걸 읽으려면 성경을 들여다봐야 하거든요.”
사람들은 온갖 잡동사니를 성경책에 보관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자세히 읽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경전을 읽지 않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읽으면 그것에 대한 믿음이 거북해지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불합리해 보이지만, 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 남고 싶다.
군중은 안락함을 주는 일종의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틀렸을 리가 없고,
그대는 홀로 있을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대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그대가 홀로 남겨졌을 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외부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홀로 있을 때,
그 홀로 있음 안에서 높은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열망, 태양을 가르는 독수리처럼
날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한다.
삶은 그 자체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기본적인 가르침들 가운데 하나이다.
삶은 그 자체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복에는 위험이 따른다. 낡은 것이 죽을 때에만 새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위험요소는 명백하다.
낡은 것은 죽었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을지 누가 알겠는가?
죽은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질 때, 더 어리고 신선한 초록의 새로운 잎이 돋아날 것이라는 보장이 있다.
떨어지는 죽은 나뭇잎은 위험을 감수하고, 나무 역시 위험을 감수한다.
자신의 삶에 변형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