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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이 피네 ] (1) 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엮으며 - 류시화

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엮으며 내가 처음 법정 스님을 뵙기 위해 송광사 뒷산 불일암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고요한 한낮,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지나 그곳에 도착하니 스님은 출타 중이고 안 계셨다. 나는 서너 시간을 주인 없는 불일암 뜰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차츰 어떤 평온함 같은 것이 내 안에 찾아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없는 빈터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료한 일이다. 나는 그냥 떠나갈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무료함 대신 이상하게도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장소가 가진 어떤 분위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떤 집이나 방은 그 주인의 내면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집과 방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방식의 삶을 사는가의 적나라한 드러남..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 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한 달 가까이 감기를 앓다가 쿨룩거리면서 이삿짐을 챙겼다. 7년 남짓 기대고 살던 오두막이지만 겨울철 지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영하 20동의 그 팽팽한 긴장감을 앓던 끝이라 몸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눈에 덮인 빙판길을 오르내리려면 목이 긴 털신에 아이젠을 걸고 다녀야 하는데, 이런 일도 이제는 번거롭게 여겨진다. 장작 패서 나르고 개울에서 얼음 깨고 물 긷는 일로 인해 내 왼쪽 엄지가 자꾸만 시큰거린다. 언젠가 아랫마을 김씨로부터 무슨 이야기 끝에 어디 바다 가까운 곳에 자기 친구가 살던 집이 있는데,그 집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무심히 흘려 듣고 말았는데 얼마 전 뒤늦게 그 말이 문득 떠올라 내 귀가 ..

무소유(법정) 2022.01.23

오두막 편지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5.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이제는 늦더위도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득거린다. 풀벌레 소리가 여물어가고 밤으로는 별빛도 한층 영롱하다. 이 골짝 저 산봉우리에서 가을 기운이 번지고 있다. 요 며칠 새 눈에 띄게 숲에는 물기가 빠져나가고 있다. 어떤 가지는 벌써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초록의 자리에 갈색이 늘어간다. 나무들은 말이 없지만 기온이 더 내려가면 앓던 잎들을 미련없이 우수수 떨쳐 버릴 것이다. 이게 바로 계절의 질서요, 삶의 리듬이다. 철이 바뀔 때면 내 안에서도 꿈틀꿈틀 무슨 변화의 조짐이 생기는 것 같다. 허구한 날 비슷비슷하게 되풀이되는 그 범속한 일상성에서 뛰쳐나오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 가을에 나는 많은 것을 정리 정돈하고 있다. 오두막에서도 ..

무소유(법정)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