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법정)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qhrwk 2022. 1. 31. 20:32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근심할 것도 없다.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우유도 짜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은 이엉이 떺이고방에는 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니 신이여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부처님)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마음의 끈질긴 미혹迷惑도 벗어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내 움막은 드러나고 탐욕의 불은 꺼져버렸다

그러니 신이여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움막은 자신을 가리킴.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모기나 쇠파리도 없고소들은 늪에 우거진 풀을 뜯어먹으며

비가 내려도 견뎌낼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내 뗏목은 이미 잘 만드어졌다 거센 물결에도 끄떡없이 건너이미 저쪽 기슭[技岸]에 이르렀으니

이제 더는 뗏목이 소용없다

그러니 신이여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내 아내는온순하고 음란하지 않습니다

오래 함께 살아도항상 내 마음에 흡족합니다

그녀에게그 어떤 나쁜 점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내 마음은내게 순종하고 해탈해 있다오랜 수행으로 잘 다스려졌다

내게는 그 어떤 나쁜 것도 없다

그러니 신이여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놀지 않고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모두 다 건강합니다

그들에게 그 어떤 나쁜 점이 있다는 평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비를 뿌리려거든 비를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그 누구의 고용인도 아니다 스스로 얻은 것에 의해온 세상을 거니노라

남에게 고용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신이여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아직 길들지 않은 송아지도 있고젖을 먹는 어린 소도 있습니다

새끼 밴 어미 소도 있고암내 낸 암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암소의 짝인 황소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아직 길들지 않은 어린 소도 없고젖을 먹는 송아지도 없다

새끼 밴 어미 소도 없으며암내 낸 암소도 없다

그리고 암소의 짝인 황소도  없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소를 매놓은 말뚝은땅에 박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문자' 풀로 엮은 새 밧줄은 잘 꾀어 있으니

송아지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황소처럼 고삐를 끊고코끼리처럼 냄새 나는 덩굴을 짓밟았으니

나는 다시는 더 모태母胎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이때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고검은 구름에서 비를 뿌리더니

골짜기와 언덕에 물이 넘쳤다

신께서 비를 뿌리는 것을 보고 다니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거룩한 스승을 만나얻은 바가 참으로 큽니다

눈이 있는 이여우리는 당신께 귀의 歸依하오니

스승이 되어주소서

위대한 성자시여.

*초기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가리켜 '눈이 있는 이' 또는 '눈뜬 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내도 저도 순종하면서행복하신 분 곁에서 청정한 행을 닦겠나이다

그렇게 되면생사의 윤회가 없는 피안에 이르러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악마 파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소를 가진 이는 소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데가 없는 사람은 기뻐할 건덕지도 없으리라."

 

스승은 대답하셨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말미암아 근심하고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강론

 

소유 지향적인 삶과 존재 지향적인 삶

 

소 치는 목자들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다.

인도듸 장마철[雨期] 4개월은 높은 평원에서 지내지만,

나머지 기간에는 소가 뜯어먹을 풀을 찾아 유목한다.

여기 등장하는 다니야는 장마철에 대비해 준비를 다 해놓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마히 강변'의 마히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큰 강'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나는 이 '다니야' 장을 읽으면 문득 오페라의 듀엣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한 목청으로는 세속의 기쁨을 노해하고, 다른 하 목청으로는 출세간의 홀가분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자기네 입장을 이야기하다가, 마침내는 근심 걱정이 사라진 해탈의 길에 함께 이른다.  

경전의 형식치고는 아주 독특하다.

 

소유 지향적인 삶과 존재 지향적인 삶은 우리들 일상에 두루 깔려 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살아가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 때,

어떤 삶이 우리가 기대어 살아갈 만한 삶이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삶인가가 뚜렷이 드러난다.

똑같은 조건을 두고 한쪽에서는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근심 걱정의

 원인으로 본다.

 

며칠 전 한 어머니가 긴 편지를 보내왔다.

자식 때문에 몹시 상심한 끝에 상면한 적도 없는 나에게 하소연을 해왔다.

얼마나 애가 탔으면 그랬겠는가.

"부모가 되어 자식을 올바르게 기르지 못하고 못난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니,

하늘을 쳐다보기도 부끄럽고 스님을 대하기도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연은, 집안의 기둥인 큰아들이 올바른 길을  잃고 도박에 미쳐 있어,

아무리 타일러도 그때뿐, 돌이킬 줄 모르니 가슴을 태우다 태우다 이제는 지쳐

가사상태에 있다고 했다.

아들은 지금 대학 4학년에 재학중으로 군에도 다녀온 터인데,

대학가에 전염병처럼 도는 도박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친정 조카가 있는데, 그도 사업을 하다 도박에 손대어 자기 부모를 괴롭히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는 이렇게 한탄의 말을 늘어놓았다.

 

"자식이 무엇인지, 나와 자식이 무슨 원수로 만났는지, 내 전생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어미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들이 무서운 쇠사슬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로 들어서게 될지 조언을 부탁했다.

요즘 대학가 일부 학생 사이에 도박이 성행한다는 소식은 풍문으로 전해 들은 바 있지만,

이 어머니가 이렇게 기로워할 만큼 심각한 줄은 미처 몰랐다.

 

우리 속담에 "무자식 상팔자"란 말도 있지만,

자식을 두면 여러 가지로 좋은 일도 많은 반면에 근심 걱정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우리 같은

처지에서는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부모들이 애를 태우면서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니 세상에 공것은 없는 셈이다. 무엇이나 그 보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바세계, 즉 겨우 참고 견딜 만한 세상이란 의미도 이런 데 있지 않은가 싶다.

 

장마가 지기 전에 나무 벼늘(낟가리)에 비옷을 덮어야겠다고 벼르기만 하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안절부절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그런가 하면, 비가 내릴 것 같아서 미리 서둘러

비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세찬빗줄기가 쏟아질 때의 그 안도감을 나는 여러 차례 겪어보았다.

그런 때면, 다니야이 가락처럼 "비를 뿌리려거든비를 뿌리소서." 를 속으로 줄얼거린다.

 

경전에는 가끔 악마가 등장하는데, 파피만을 한문으로는 파순波旬이라고 번역한다.악마란

외부의 세계에서 와서 해코지를 하는 나쁜 무리이기보다는, 우리들 내면의 갈등을 상징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흔히 갈등에 부딪히는 수가 있다.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마음 한쪽에서는 저렇게 하는 것이 손쉽고 편리한데 무엇 하러 그런 모험을 하려 하느냐고

충동질한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데가 없는 사람은 기뻐할 건덕지도 없으리라."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말이다.세상의 즐거움이란 분명히 이런 데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상황을 다른 입장에서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근심걱정은 집착에 그 원인이 있다. 어떤 성질의 집착이든지 집착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ㅇ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을 하되

그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자녀 없이 사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한 가정을

이룰 때 거기에는 으레 자녀가 따르게 마련이다.  자녀가 있음으로 해서 집안에 화기和氣가 돌고,

부모 자식 간의 따뜻한 정과 유대도 생긴다. 그 대신 자녀가 없는 집은 단촐하고 냉랭하고 

삭막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자식에게 너무 기대를 두고 집착을 하면 언젠가 기대를건 만큼 상처를 입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애지중지하며 마치 애완동물이나 소유물처럼 착각할 때,

그 상처는 더욱 크다.부모 자식 사이라 할지라도 어떤 인연에 따라 만나서 함께 살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것이 이 세상의 도리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다져져 있다면 너무 기뻐할

것도 없고, 너무 속상해할 것도 없다. 

집착할 떼가 없는 사람은 기뻐할 건덕지도 없겠지만, 다른 한편 집착하지 않는 삶은근심 걱정할

것도 없다.  이것이 또한 우리들 인생의 미묘한 양면성 아니겠는가.

 

최근 강옥구 씨의 에세이집 《들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를 기분 좋게 읽었다.

지난 가을은 이 일  저 일에 밀려 분주히 보냈는데, 이런 글을 대하자 밖에서 묻혀온 피로가 말끔히 가셨다.

한 목사님에게 써보낸 글들로 엮은 책이지만, 개인적인 서한집의 성격을 벗어나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다.

"누구나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이 여인과(또는 이 남자와) 일생을 함께 대화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해봐야 한다.   결혼생활에서 그 외의  것은 다 무상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의 부부관계는 순수한 나와 순수한 너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대화가 아닌,내 자신에 대한 나의 이미지와 너에 대해 내가 만들어놓은 이미지 사이에서

이루어진 대화로 꾸며지기 때문에,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생기는 차질만큼 좌절과 갈등과

실망과 불만으로 가득합니다.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으로 우리는 결혼생활에서 대화가

아닌 물질적인 보상이나 자극을 구하는것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은

그들이 지니는 물질적인 속성, 즉 재보고 달아보고비교하는 그런 속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항상 실망을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비극은 가족끼리 한자리에 모여 서로 속뜰을 열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생각하고 이해하는 대화가 끊긴 데 그 요인이 있을 것이다.   진정한 대화란 일상적인

말의 주고받음이나 길바닥에서얻어들은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람의 일을 진지하게 살피고생각한 바를 나눔으로써 영혼을

울려주고 삶의 의미를 함께 나누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통적인 지적知的 관심사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탐구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부부 사이건 친구 사이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저 그렇고

그런 시들한 관계로 빛이 바래고만다. 살아 있는 꽃이 아름다운 것은 순간순간 자신이 지닌

빛깔과 향기와 형태를 마음껏 드러내기 때문이다.

 

18년간 결혼생활을 하면서 좋은 대화의 동반자로서 자신을 이끌어준 남편에게 감사하면서,

그는 이런 말도하고 있다.   "사랑은 질투가 아니고 집착이 아니고 소유가 아니고 쾌락이

아니라고 한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흔히 부부관계 안에서

욕망과 질투와 쾌락과 소유욕을 사랑과 혼동하고 있으니까요.

 

나와 너의 관계 안에서 내가 화를 내거나 질투할 때 그 화와 질투가 곧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 '나'를없애지 않고는 화나 질투가 살지지 않으며, '내'가 떠나버린 빈자리에만 참으로

자비와 사랑이 가능하다고하였습니다."  

좋은 사이란 진정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있음[存在]이 함께 맺어지고 확인된다.  

탐구하는노력으로 인생은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