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지복의 경험

qhrwk 2022. 2. 17. 08:21

지복의 경험 

고타마 붓다의 제자 한 명이 붓다의 메시지를 설파하러 여행을 떠나던 참이었다. 
그가 붓다를 만나러 와서 그의 축복을 구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는지 물었다.
고타마 붓다가 말했다.
“한 가지만 명심하라. 걸어갈 때, 시선을 네 척 앞으로만 응시하고, 그대 앞으로 네 척 앞만 바라보고 걸어라.”
그날 이후로 2천5백 년 동안 불교 승려들은 같은 방식으로 걸었다.
그것은 특히 근처의 여인들을 바라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제자들은 승려였고, 금욕을 선서했었다.

고타마 붓다의 다른 제자인 아난다는 왜 승려가 네 척 앞에만 시선을 두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물었다.
“저는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붓다가 말했다.
“그래야 그가 적어도 여인의 얼굴을 보는 걸 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기껏해야 여인의 발을 보게 될 것이다.”
아난다가 말했다.
“하지만 여인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그녀가 우물에 빠져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제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여인의 얼굴과 몸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여인을 봐도 좋지만, 그것은 규칙이 아니라 예외일 뿐이니라.”
아난다가 말했다.

“만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여인이 길에서 넘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제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인을 도와서 일으켜야 합니까? 노파가 길을 건너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붓다가 말했다.
“예외의 경우에는-그것은 규칙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한 가지 조건으로 여인을 접촉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예외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 조건은 그가 거울로서 존재하고 어떠한 판단이나 태도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여인이 아름답다거나 그 여인이 멋지다는 것은 판단이다. 
그는 거울로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그는 예외가 허락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인을 우물에 내버려두어라.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구해줄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구하라!”

붓다가 말하는 것은, 마음이 어떤 욕망, 욕심, 탐욕, 야망, 소유욕을 갖게 되는 모든 상황에서 명상가는 
그저 거울로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단지 거울이 된다는 것은 그대가 그저 깨어있다는 뜻이다. 
순수한 자각이 있다면, 마음은 그대를 진흙탕이나 시궁창으로 끌어내릴 수 없다. 
마음은 매우 조급하기 때문에 그대의 존재 전체는 깊은 침묵에 든다. 깊은 이해를 통해서 평화가 찾아온다.
그런 평화, 침묵, 기쁨, 지복은 자연스럽게 두뇌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뇌에 잔물결을 일으킬 것이고, 두뇌의 뇌파 길이를 바꿀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는 그런 뇌파의 흐름을 읽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기계 장치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이런 뇌파를 만들어주면, 우리는 고타마 붓다의 심오함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짓은 당장 그만두어라.
그대의 기계 장치들은 좋은 것일 수 있다.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것들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 
그것들이 비록 인공적이긴 해도 그대에게 평화와 침묵을 안겨줄 수 있고, 평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목마른 자에게는 더러운 물도 더러워 보이지 않는 법이다. 
목마른 자에게는 오염된 물도 크나큰 축복이 된다.
따라서 그대는 실험을 해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명상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 
그것은 짧은 휴식이자 이완이다. 그리고 거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것을 명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순간, 그것은 분명히 해가 된다.
이런 사람들은 기계 장치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인위적인 침묵을 통해서 이것이 전부이며 명상을 얻었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계 장치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의 마음에 평화를 주는 기계적인 방법일 뿐이다. 평화로운 마음은 진짜 평화가 아니다. 
진짜 평화는 마음이 부재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내면으로부터 가능하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 기적을 발견할 수 있는 지성과 이해를 갖고 있다.”

잠시라도 평화를 찾을 수 없고 이완할 수 없으며 마음이 계속 재잘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계 장치들과 생체 반응 기계들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명상은 아니며, 단지 사람들이 이완하고 인공적인 고요함을 안겨줄 수 있는 기계 장치에 불과하다는 점을 그들에게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이런 고요함이 진정한 내적 평화의 원천을 발견하고 싶은 열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런 기계 장치들은 벗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장치들을 사용해온 기술자들은 장애물이 아니라 교량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기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을 주되 이것이 명상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심어주지는 말라
. 이것은 진정한 것의 먼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주어라. 
그대가 진정한 것을 원한다면, 내면의 깊은 탐구를 통해 들어가고, 마음을 깊게 이해하고, 마음이 부리는 온갖 
교활한 술수를 자각해서 마음을 옆으로 치워둘 수 있도록 하라. 
그때 그대와 존재계 사이에는 더 이상 마음이 존재하지 않게 되며, 진리를 향한 문이 열릴 것이다.
명상은 지복에 대한 궁극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어떤 약품이나 기계,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 오쇼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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