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사랑의 샘

qhrwk 2022. 2. 17. 08:16


사랑의 샘 

밀린다Milinda 왕이 승려 나가세나Nagasena를 왕궁으로 초청하려고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와서 ‘폐하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당신을 왕궁으로 초청하셨습니다.’라고
말하자 나가세나가 대답했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신다면 내가 왕궁으로 가리다. 그러나 여기에 나가세나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소.
여기 있는 이 물건은 그저 이름일 뿐이오. 필요에 의해 붙여진 표찰 같은 것이지요.”
사신이 왕에게 돌아와 나가세나가 한 말을 전하면서 그는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고했다. 왕이 말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군. 어쨌든 여기로 오는 중이라고 하니 만나보면 알겠지.”
나가세나가 왕이 보내준 마차를 타고 도착했다. 왕이 친히 문까지 나가 그를 영접했다.
“어서 오시오, 나가세나. 당신을 환영하오.”
이 말을 듣고 나가세나가 웃으며 말했다.
“나가세나로써 폐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가세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왕이 말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와서 나의 영접을 받고 있는 사람은 누구요?
지금 내 앞에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란 말이오?”

나가세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폐하, 저기에 제가 타고 온 마차가 보이십니까?”
“예, 보입니다.”
“마차에서 말을 떼어 놓으십시오.”
왕의 명령에 따라 신하들이 마차에서 말을 떼어 놓았다. 그러자 나가세나가 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말이 마차입니까?”
“아니, 말을 어떻게 마차라 부를 수 있겠소?”
나가세나의 신호에 따라 말을 다른 데로 보내고 이번에는 마구馬具를 받치는데 사용하는 지지대를 떼어냈다.
“이 지지대가 마차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이 지지대를 어찌 마차라 부를 수 있겠소?”

이런 식으로 나가세나는 마차의 부품을 하나씩 분리해 나가면서 질문을 던졌고, 그때마다 왕은
‘이것은 마차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해야 했다.
마침내 마차가 완전히 분해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가세나가 물었다.
“자, 이제 폐하의 마차는 어디에 있습니까? 부품을 하나씩 떼어내며 물을 때마다 폐하는 ‘이것은 마차가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이제 말씀해 보십시오. 폐하의 마차는 어디로 갔습니까?”
왕은 당혹스러웠다. 무엇인가 큰 가르침이 머리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마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품을 하나씩 떼어냈고, 그 부품들 중 어느 것도 마차가 아니었다. 그런데 마차가 사라졌다!

나가세나가 말했다.
“제가 전하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마차는 여러 부품의 조합이었을 뿐입니다. 마차 자체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라.
에고가 어디에 있는가?
그대의 ‘나’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도 그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 에너지의 복합체일 뿐이다. 자체적인 실존성이 없는 것이다. 한군데도 빠짐없이 자세히 살펴보라.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랑은 이 무無로부터 나온다.
이 공空의 차원, 이 무無는 그대가 아니다. 이 공의 차원은 순수한 신성神性으로 충만하다.

사랑은 오직 공空에서 태어난다. 이 비어있음emptiness만이 다른 비어있음과 만나 하나로 융화될 수 있다.
두 사람이 아니라, 두 개의 무無가 하나로 만난다. 거기엔 벽이 없다. 다른 모든 것들은 높은 벽을 갖고 있지만
무無에는 장벽이 없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개인이라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가 사라지면 ‘내가 존재한다.’라는
자의식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 뒤에 남는 것은 ‘나’가 아니라 전체the Whole이다.
이렇게 경계가 무너지면 내면에 숨어있던 사랑의 강물이 모든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 사랑의 강물은 항상 흐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대의 ‘나’는 장벽이 사라지고 밖으로 흘러나올 수 있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물을 판다고 가정해보자. 물은 이미 땅 속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다. 다만 돌과 흙을 치워내기만 하면 된다.
우물을 팔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래에 숨어있던 물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물은 이미 아래에 존재한다. 자신을 표현할 공간만 있으면 언제든지
드러날 준비가 되어 있다. 물은 텅 빈 공간을 갈망한다. 꽉 들어차 있는 흙과 돌만 걷어내면 물이 솟아난다.
사랑도 이와 같다. 사랑은 이미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 그것이 표면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빈 공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는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인간이 ‘나’를 내세운다.
이렇게 ‘나’를 주장하는 것은 우물이 흙과 돌로 메워져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랑의 샘이 솟아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 오쇼의 <섹스란 무엇인가> 중에서

 

 

'향기로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짜 도둑  (0) 2022.02.17
지복의 경험  (0) 2022.02.17
예외는 없다  (0) 2022.02.17
깊게 들어가라  (0) 2022.02.13
무엇이 그대를 질투하게 만드는가?  (0) 202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