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읽는 부처님 말씀] 늙음과 죽음 앞에 선 인생
늙음과 죽음 앞에 선 인생
부처님이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늙은 육신을 보고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거룩하신 몸도 과거와는 다르옵니다. 거룩하신 몸이 왜 이렇게 쪼글쪼글하나이까?”
“네 말처럼 나의 몸은 이전과 다르구나. 왜냐하면 사람의 몸이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나도 벌써 늙어 나이가 80세가 넘었구나.”
다음 날 부처님은 아난존자와 사위성으로 걸식을 나갔다가 파세나디 왕의 궁전 앞을 지나게 되었다.
궁전 앞에는 낡아서 부서진 수레가 여러 대 버려져 있었다.
아난다는 그 수레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 수레도 옛날에는 매우 아름답더니 오늘 보니 부서진 기와조각과 같나이다.”
“그렇구나. 네 말처럼 저 수레들도 옛날에는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낡고 부서져
다시는 쓸데가 없게 됐다. 물건도 이렇거늘 하물며 사람 몸이겠느냐. 비록 백년을 산다 해도 이 몸은
무너져 죽음으로 돌아가느니라.”
그때 마침 수행자들에게 아침공양을 올리던 파세나디 왕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의 몸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있나이까?”
“그렇다. 여래에게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 여래도 사람일 뿐이다.”
부처님은 탁발을 마치고 기원정사로 돌아와 수행자들에게 말씀했다.
“세상 사람들은 네 가지를 좋아한다.
젊음과 건강과 장수와 은애를 좋아한다.
또 네 가지를 싫어한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은애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누구도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깨닫고 거룩한 계율과 삼매와 지혜와 해탈의 도를 배우면 생로병사의 뿌리를 끊고
다시는 후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나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 고요한 열반을 성취하도록
하여야 한다.”
<증일아함 18권 ‘사의단품(四意斷品)’ 제6경>
인간은 낡고 부서진 수레처럼 누구든 생로병사 피할 수 없어 속절없이 지나가는 허무한 삶 후회 없는
인생으로 가꿔가야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하는 농담 가운데 하나.
“나이 50이 넘으면 배운 여자나 못 배운 여자나 똑 같다.
60이 넘으면 화장한 여자나 안한 여자나 똑 같다.
70이 넘으면 남편 있는 여자나 없는 여자나 똑 같다.
80이 넘으면 돈이 있는 여자나 없는 여자나 똑 같다.
90이 넘으면 죽은 여자나 산 여자나 똑 같다….”
이 농담은 은근하게 여성들의 미모나 성적 매력에 관한 것을 주제로 삼는 것이어서 점잖지는 않다.
농담의 대상을 여성에게만 적용하는 것도 객관적 진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의 경우도 이 비유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농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생의 나이 듦과 삶의 허무’에 대한 것이다.
시간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10대의 시간은 10km로 가지만 20대는 20km... 50대는 50km, 70대는 70km로 달린다는 것이다.
이런 비유는 나이든 사람일수록 실감한다.
세월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서 이르는 종착역은 무덤이다.
부처님조차도 당신의 늙은 육신을 바라보며 ‘낡고 부서진 수레’에 비유하는 장면은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문제는 이렇게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 직면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처럼 계속 미워하며 욕심 부리며 살아갈 것인가, 화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
살아갈 날은 적고 죽을 날은 가깝다.
각자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홍사성 / <불교평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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