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발심한 납자가 알아야 할 공부1 ♣
1. 생사심을 해결할 발심을 하라
참선할 때에는 가장 먼저 생사심(生死心)을 해결하겠다는 굳은 마음을 내야 한다.
그리고는 바깥 세계와 나의 심신이 모두 인연으로 이룩된 거짓 존재일 뿐 그것을 주재하는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아야 한다.
만약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이치를 깨치지 못하면 생사에 집착하는 마음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재촉하는 귀신이 순간순간 멈추지 않고 따라다니게 되니, 문득 이것을
어떻게 쫓아버릴 수 있겠는가?
오직 이 한 생각만을 가지고 수단 방편으로 삼아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아날
길을 찾듯해야 한다.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려 해도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고, 가만히
있자니 그럴 수도 없으며,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한 생각도 일으킬 수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으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모름지기 타오르는 불도 돌아보지 말고 목숨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남이 도와주기를
바라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도 말고 잠시 머물러 있을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는 곧장 앞으로 달아나 우선 불길 밖으로 뛰어나오는 길만이 묘수이다.
2. 의정을 일으켜라
참선하는 데에는 의정을 일으키는 일이 중요하다.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예컨대 우리가 어디로부터 태어나는지 모르니 그 온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생사문제라는 관문을 뚫지 못했을 때 문득 의정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맺혀서 눈꺼풀 위에
머물고 있어, 내치려 해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두고 달아나려 해도 갈 수가 없다.
그러다가 홀연히 하루 아침에 의정의 뭉치를 때려 깨고 나면, “이 생사 라는 두 글자가 어느
집구석에 한가하게 놓인 가구란 말이냐! ”라고 외치게 된다. 아! 옛날 어느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
3. 일념으로 정진하라
참선할 때 죽음 이라는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늘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죽은 상태와
똑같이 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오직 이 문제를 밝혀야겠다는 그 한 생각만이 눈앞에
남아있게 된다. 이 때의 한 생각이란 하늘을 찌를 정도의 긴 칼과 같아서 무엇이든 갖다 대는
족족 베어지므로,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힌 것을 걸러내고 둔한 것을 갈다
보면 칼은 사라진 지 오랜 뒤가 될 것이다.(주: 초나라 때 한 사람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다가
실수하여 칼을 물 속에 빠뜨렸는데, 그 자리에서 뱃전에 표를 해두었다가 배가 나루에 닿은 뒤
표를 해 둔 뱃전 밑의 물 속에 들어가서 칼을 찾고 있더라는 각주구검의 고사. 여기서는 점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다.)
4. 고요한 경계를 조심하라
참선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은 고요한 경계에 빠져들어 사람을 말라 죽은 듯한 적막 속에
갇히게 하는 태도이다.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은 번거로운 곳을 싫어하고 고요한 곳에서는
대부분 염증을 느끼지 않는다. 도를 닦는 수행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시끄러운 바닥에서만 내내 살던 이가 일단 조용한 경계를 맛보고 나면 그것이 꿀이나 되는 양
달갑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사람은 권태가 오래되면 잠자기를 좋아할 것이니, 자기가 이런
병통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어떤 외도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없애어 딱딱한 돌처럼 되게 하였다 하니 이것도
고요한 경계를 통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마를 대로 마르고 적막할 대로
적막해져서 아예 인식작용이 없는 상태까지 가버렸으니 목석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들이 혹 고요한 경계에 처할 때는 오직 법복 속에서 벌어지는 한 가지 큰일, 즉 육신의
생사를 깨치는 데 힘써야 한다. 자기가 고요한 곳에 있는 줄을 몰라야만 비로소 옳다 하겠다.
생사대사에서 고요한 모습을 구하려 해도 정말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면 이야말로 된 것이다.
5. 자기 공부에만 매진하라
참선할 때에는 마음을 똑바르고 곧게 하여 남의 사정을 봐주지 말아야 한다.
남의 인정 사정 다 봐주다가는자기 공부가 향상되지 못한다. 공부가 향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세월이 오래 가면 반드시 속세에 물들어 스승에게 아부까지 하게 될 것이다.
6. 의단을 깨라
참선하는 납자는 고개를 쳐들어도 하늘을 못 보고 고개를 숙여도 땅을 보지 못하며, 산을 보아도
산으로보이지 않고 물을 보아도 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또한 길을 걸어가도 걷는 줄을 의식하지 못하며,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을 몰라야 한다.
많은 인파 속에서도 한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온통 의심
덩어리 하나뿐이니 세계를 하나로 뒤섞어놓았다 할 만하다. 이 의심 덩어리를 깨뜨리지 않고는
맹세코 마음놓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공부에 있어서 긴요한 것이다.세계를 하나로 뒤섞는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 전부터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이치는 소리도 없이 고요하여 한 번도
움직인 일이 없다.요는 참선하는 자가 알음알이를 다 떨어버렸을 때, 천지가 뒤바뀌면서 자연히
거꾸로 용솟음쳐오는 한 줄기 파도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을 몸으로 받은 듯한 상태를 말한다.
7.의정과 하나가 되라
참선하는 납자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살아만 있고 죽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는 결단코 의정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들떠 움직이는 경계를 굳이
떨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고, 허망한 마음도 억지로 맑히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맑아진다.그리하여 6근이 자연히 텅 비어 자유로와진다. 이런 경지에서는 움찔했다
하면 벌써 마음먹은 곳에 가 있고 입만 벙긋했다 하면 벌써 반응이 있게 되니,살아나지 못할까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8.세 가지 폐단을 조심하라
공부가 향상되기를 바란다면, 천근되는 짐을 어깨에 걸머진 듯하여 팽개치려 해도 내려놓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잃어버린 중요한 물건을 찾듯하여 확실하게 찾아내지 못하면
맹세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아집과 집착 알음알이가 생기는 일이다.아집은 병이 되고
집착은 마가 되며 알음알이는 외도로 빠지게 한다. 결단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열심히 공부하면 앞서 말한 세 가지 폐단이 얼음 녹듯 말짱해질 것이다. 이른바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들뜨게 하면 그 자리에서 법체와 어긋난다 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9. 또렷하게 깨어 있는 채로 참구하라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납자는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처럼 분명하고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옛사람도 적군의 목을 베지 않고는 맹세코 쉬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의 도깨비굴 속에 들어앉게 되어 어둡고 깜깜한 채로 일생을 다 보내고 말
것이니 참선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두 눈을 반짝 뜨고 목표물을 노려보며 네 다리에는 힘을 주고 곧추서서
오는 쥐를 잡아 입에 물어야만 비로소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비록 닭이나 개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돌아볼 정신이 없다.
참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오직 열심히 이 도리를 밝히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8경(마음을 흔들어 놓는 8가지 경계)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해도 신경 쓸
틈이 없을 것이다.
여서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쥐는커녕 고양이마저도 달아나고 마는 것이다.
10. 하루에 공부를 다 마치듯 하라
참선할 때는 날마다 하루할 공부를 다 마쳐야 한다. 미루고 질질 끌면 백겁천생토록 끝내
공부를 다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언젠가 나는 향 한 개비를 꽂아놓고 그것이 다 타는 것을
보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공부가 늘 그저 그러하여 나아진 것도 퇴보한
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하루에 몇 개비의 향이 타겠으며 1년이면 얼마만큼의 향이 타겠는가?
그러고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생사문제를 아직 밝히지 못했으니 어느 날에나 공부를 마치고 깨닫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11. 옛사람의 공안을 천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옛 스님들의 공안을 알음알이로 헤아려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비록 그런 식으로 하나 하나의 뜻을 깨닫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공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즉 옛 스님들의 말씀은 마치 큰 불덩어리 같아서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그 가운데 어떻게 앉아보고 누워볼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말씀에다 다시 이러니
저러니 분별을 일으켜 자기 신명을 망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12. 선에서의 바른 믿음
이 공부는 교학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대승을 공부해 온 사람도 선(禪)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하물며 성문 연각을 공부하는 소승에 있어서랴!
3현 10성이 어찌 교(敎)에 통달하지 못했을까마는 오직 참선하는 일에 대해 설법할 때만은
그렇지 않아서 3현 보살은 간담이 떨리고 10지 보살도 혼이 빠진다고 하였다.
또한 등각보살도 마찬가지이다. 등각보살은 비오듯 자재한 설법으로 무량한 중생을 구제하시며
무생법인을 얻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아직은 소지장에 막혀 도와는 완전히 어긋난 사람이라고 하셨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선종에서는 범부에서부터 완전히 부처와 똑같다고 한다.
이 말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데가 있겠으나, 믿는 사람은 선(禪)을 할 수 있는그릇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근기가 아니다. 모든 수행자가 이 방법을 택하려 한다면 반드시 믿음으로 부터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믿음 이란 말에도 그 뜻이 얕고 깊은 차이와 바르고 삿된 구별이 있으므로 가려내지
않으면 안된다.믿음이 얕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불교에 입문한 이라면 뉘라서
신도가 아니라고 자처할까마는 그런 사람은 단지 불교만을 믿을 뿐 자기 마음을 믿지 않으니
이것을 말한다. 믿음이 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대승보살도 아직 믿음을 갖추었다
할 수는 없으니, [화엄경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나는 지금 설법을 하고 대중들은 그 법문을
듣고 있구나. 이렇게 의식하면 그 보살은 아직 믿음의 문턱에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가령 [화엄경]에 나오는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즉심시불(卽心是佛)] 라고 한 말씀은 누구나가
다 믿노라고 한다. 그런데 네가 부처냐? 라고 묻게 되면 영 어긋나버려서 알아듣지를 못한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다해서 아무리 재어보아도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생각을 다해 재보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이는 벌써 믿음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르다 삿되다 한 것은 무슨 차이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 이라 하고, 마음 밖에서 법을 얻으려는 것을 삿된 믿음
이라 한다. 그대로가 부처임을 철저히 밝혀 자기 마음으로 직접 맛보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바른 믿음 이라 할 수 있다.
얼굴만 번듯하고 속은 어리석은 노름꾼 같은 이는 단지 말로만 마음 그대로가 부처 라고 떠들
뿐이지 사실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을 바로 삿된 믿음 이라고 한다.
13. 본체를 보아야 선정에 든다
옛 선사는 복숭아를 따다가도 문득 정(定)에 들고, 호미로 밭을 매다가도 문득 정에 들었으며,
절의 자잘한 일을 하면서도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한 곳에 오래 눌러앉아 외연을 끊고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정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이를 곧 삿된 선정 이라고 하니, 이는 납자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이 아니다.
6조 혜능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 속에 계셨으며, 선정에 들지 않으실 때가 없었다.
모름지기 본체를 확실하게 보아야 비로소 이러한 선정과 하나가 된다.
석가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와 왕궁에 태어나시고, 설산에 들어가 샛별을 보고 허깨비 같은
중생을 깨우쳐주신 일들이 모두 이 선정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들뜬 경계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 그래서야 어찌 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
들뜬 경계에 있어서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고요하든 들뜨든 간에 전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여기서 무엇을 가지고 경계를 삼겠는가?
이 뜻을 깨달을 수 있으면 세상이 온통 정(定)이라는 하나의 몸으로 꽉 차서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14. 세간법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참선하는 납자는 세간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불법에도 오히려 조금이라도
집착해서는 안되거늘 하물며 세간에 매달려서야 되겠는가. 만약 화두공부가 제대로 되면 얼음을
뒤집어 써도 차가운 줄을 모르며, 불을 밟고 가도 뜨거운 줄을 모르며, 가시덤불을 지나가도
걸리거나 막히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세간법에서도 자유로와진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바깥 경계에 끄달린다.
여기에서는 조그만큼의 공부를 이루려 해도 당나귀해(12간지에 없는 해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음을 비유함)가 되도록 끝없이 기다려 보았자 꿈속에서도 공부의 진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15. 언어 문구를 배우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문구를 따져 연구하거나 옛사람의 말씀이나 외우고 다녀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은 무익할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알음알이로
전락해 버린다.
이러고서는 마음의 움직임이 완전히 끊긴 자리 에 이르려 한들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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