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인천보감(人天寶鑑)

qhrwk 2025. 1. 12. 08:44

 

♣인천보감(人天寶鑑)♣

인천보감(人天寶鑑) 당나라 덕종(德宗:779-805)이 담광(曇光)법사에게 물었다. 
“스님네들을 어째서 보배라 합니까?” 담광법사가 대답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스님네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그 모두를 보배라 합니다. 


첫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단박에 깨쳐서〔頓悟〕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대열에 들어간 분을 
선승(禪僧)이라 합니다. 

둘째는 이해〔解悟〕와 실천〔修行〕을 동시에 행하여 세간 흐름에 들어가지 않은 분을 

고승(高僧)이라 합니다. 

셋째는 계정혜(戒定慧)를 고루 갖추어 설법솜씨가 뛰어난 분을 강승(講僧)이라 합니다. 
넷째는 견문이 깊고 알차서 옛일로 지금 일을 검토하는 분을 문장승(文章僧)이라 합니다. 
다섯째는 인과(因果)를 알고 자비와 위엄을 함께 쓰시는 분을 주사승(主事僧)이라 합니다.
여섯째는 열심히 공부에 정진하여 부처종자를 기르는 분을 상승(常僧)이라 합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시고 마침내 천하에 조서를 내려 승려되는 것을 허락했다. 
대선(大善) 선사는 남악(南嶽) 선사의 삼수제자로서 법화선문(法華禪門)을 닦아 

자비삼매(慧悲三味)를 얻었다. 

당시 형양내사(衝陽內史) 정승고(鄭僧杲)란 현령 진정업(陳正業)에게서 스님의 덕을 

칭찬하는 말을 늘 듣기는 했었지만 믿음을 낼 생각은 없었다. 
하루는 진정업과 함께 사냥을 나가서 사슴 한떼를 포위하게 되었다. 

정승고가 진정업에게 물었다. 


“그대가 늘 대선스님은 자비삼매력이 있다고 하였는데, 오늘 저 사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진정업이 좌우 몇 사람을 거느리고 함께 소리높이 “나무대선선사”를 염하니 즉시 뭇사슴들이 

하늘로 치솟아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자 정내사는 부끄러워하며 굴복하였다. 

좌계존자(左溪尊者)의 법명은 현랑(玄郞:673-754.천태종 스님)이며 조상(鳥傷) 사람이다.
천궁사(天宮寺) 혜위(慧威) 법사에게 불법을 배워 종지를 얻고, 뒤에 바위산 골짜기에 숨어

살았는데, 원숭이가 열매를 따 가지고 와서 발우에 바치기도 하고 혹은 날아가던 새가 와서 

법문을 듣기도 하였다. 
비구에게 필요한 열여덟 가지 물건만을 가지고 12두타(十二頭陀)를 행하면서 삼십년을 

이렇게 살았으며, 세세한 수행과 몸가짐은 모두 계율을 따랐다. 

이화(李華 : 당나라 문인)는 스님에 대해 이렇게 밀하였다.
“누구에게선 선을 전수받은 적도 없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계율을 청정히 지켜 

흠이 없었고 외모에 신경쓰지 않았다 
경을 강의해도 대중이 많기를 기대하지 않았으며, 고단한 줄 모르고 학인을 지도했다. 
구석진 집에 살면서 두 가지 반찬있는 밥을 먹지 않았다. 경전을 공부할 때 말고는 밤에 

등불을 켜지  않았고, 부처님 상호를 우러러 예불할 때 말고는 낮에 헛걸음을 걷지 않았다. 

가사 한 벌로 사십년을 지냈고 깔방석 한 장을 죽을 때까지 갈지 않았다. 
이익 때문에는 한 마디도 법문한 적이 없고, 터럭만큼도 불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재물을 

받은 일이 없는 분이다. 
오대산 무상(無相:684-162) 선사가 예불하고 대중에게 법문하셨다. 
그대들은 진흙부처를 보았다 하면 절구에 쌀을 찧듯 절만 하고 아무 생각도 해보지 않으니,

자기 몸에  부처님이 한 분씩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허공을 타고온 많은 석가와 관음이 밤낮으로 그대들의 육근에서 빛을 내뿜고 땅을 흔든다. 
거닐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 사이에 언제나 함께 들면서 실오라기만큼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이 부처님에게 예불 드리고 배우지 않고 도리어 흙덩이한테 가서 살길을 찾고 있느냐.
그대들이 이 부처님에게 예불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마음에 예불 드리는 것이다. 
그대들 마음이 비록 뒤바뀐 헛된 마음이라 해도 그것은 본디부터 지금까지 넓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미혹하다 하나 한번도 미혹한 일이 없었고, 깨달았다 하나 한번도 깨달은 일이 
없어 부처님보다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다만 바깥경계에 탐착하여 생멸과 미오(迷悟)가 있게 되었으니, 만일 한 생각에 
회광반조할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은 말하기를 
“부처가 자기 마음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밖에서 찾고 있네. 값을 칠 수 없는 보배를 속에 
지니고도 일생을 쉴 줄 모르네.” 라고 하였다.

또 화엄 수(華嚴遂)법사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내가 마음이 본래 성품임을 깨닫고 나니 
지금의 모든 수행과 동정(動靜)이 본래 성품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수행〔道〕과 이치〔理〕가 부합하는 까닭에 종일토록 예불해도 예불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종일토록 염불해도 염불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자, 말해 보아라. 내가 어떻게 
이것을 알아냈겠는가? 마치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비로자나 누각에 들어가 불가사의하고 자재한 
경계를 깨친 것과 같다. 선재동자는 마지막 경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110성(城)을 돌아다니며 53선지식을 찾아뵈었다. 

그러면서 갖가지 경계를 보고 온갖 법문을  들어 보았으나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온갖 일을 보지만 꿈을 깨고 나서야 그 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도력 높은 선사들과 선재동자는 꿈속에서 밝고 신령스런  그것을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오음경계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만일 정수리에 눈이 있고  팔꿈치에 부적

(符籍)이 있었다면 석가와 미륵도 마른 똥막대일 것이고 문수 보현도 땅에 깔린

범부였을 것이다. 

또한 진여열반도 나귀 매는 말뚝이고 일대장경도 고름 닦는 종이였을 것이니, 무슨 들어갈 

누각이 있고 깨칠 경계가 있겠는가. 
혹 이렇지 못하다면 그 사람들의 꿈속에서 한번이고 두번이고 절해야 할 것이다.” 
천태산(天台山) 덕소(德韶:891-972. 법안종) 국사는 처주(處州) 용천(龍泉) 사람이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 매서운 의지로 선지식을 찾아 도를 물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종산에 와서도 대중에 섞여 살았는데, 한번은 한 스님이 법안스님께 묻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 스물네시간을 어떻게 하면 단박에 온갖 인연을 쉴 수 있겠습니까?” 법안스님이 말씀하셨다.
“공(空)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더냐, 색(色)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더냐? 

공이 인연을 맺는다고 할 것인가. 공이란 본래 인연이 없는 것이다.

색이 인연을 맺는다고 할 것인가.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일상생활에 어떤 물건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는다는 말이냐?” 

덕소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머리끝이 쭈뺏해지며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또다시 어떤 선객이 물었다.

 “무엇이 조계(曹溪) 근원의 물 한 방울입니까?” 법안스님이 말씀하셨다. 
“이것이 조계 근원의 물 한방울이로구나.” 덕소 스님은 듣고서 확실히 깨쳤다. 

법안 스님께서
“그대는 앞으로 우리 종지(宗旨)를 널리 펼 사람이니, 이곳에 지체하지 말라” 하시므로 
마침내 천태산을 돌아다니시다가 그곳이 좋아 그곳에서 생애를 마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당시 오월(吳越)의 충의왕(忠懿王)이 왕자의 신분으로 태주에 자사(刺史)로 있었다. 
그는 스님의 높은 명성을 듣고 한번은 사람을 보내 스님을 맞이하여 제자의 예를 올렸다.
왕이 하룻밤 어떤 사람에게 목이 잘리는 꿈을 꾸었는데 놀람과 의심이 풀리지 않아 마침내 
스님께 해몽을 부탁하였다.
스님께서 “비상한 꿈입니다. 
주(主)자에서 점 하나를 없앴으니, 곧 왕이 되실 것입니다.” 하자, 
왕은 “과연 말씀같이 된다면 부처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건우 원년(乾祐元年:948), 충의왕은 임금자리를 물려받고 스님을 높이 받들어 국사로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