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권 《바람이 시작되는 곳》 - 제5장 함께 가는길(1)
노승은 두 사람을 마주 앉히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조차 오래 쌓인 세월의 무게처럼 방 안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그는 낮고 단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가 보아라. 배움이란 넓히고 깊이를 더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물러 좁은 안목으로 안주하게
되고, 널리 세상에 펼쳐 내지를 못한다. 지금 신라의 불법은 겉모양은 성하나, 교학의 근본은
점차 쇠하고 있다. 넓어질수록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뿌리를 더 깊이 내려야
하는 법이다.
불법은 결국 널리 사람들의 삶으로 스며들어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라.”
노승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 바다를 향한 시선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 땅의 불법을 지키는 길은, 이 땅에만 머무는 데 있지 않다. 마치 저기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나라에서 부터 인연 따라 흘러온 이 귀중한 불법이 이곳에서 다시 꽃을 피웠듯이, 이제는
너희가 바다를 건너 그 근원을 다시 깊이 더듬고, 새 물을 길어 와서 다시 백정법(白淨法)을
피워야 할 때이다. 너희들의 발걸음은 한 개인의 구도가 아니라, 이 나라 불법의 생명줄이
될 수 있음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해라.”
그 소리는 오래 묵은 기다림의 울림 같았다.
노승의 손에 쥔 염주알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 말 끝에 방 안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그날 밤, 의상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경전을 펼쳤다 덮기를 반복하며 마음속으로 수 많은 길을 건넜다. 당나라까지의 여러 상상속의
산맥과 바다, 낯선 장안의 거리 그리고 사람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숨결이 방 안을 맴돌았다.
창호지 너머 달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반면 원효는 마을로 내려갔다.
장터에서 다투는 두 노파 사이에 끼어 웃으며 중재하고, 술에 취한 사내를 집으로 부축까지
해서 보냈다. 아이 하나의 찔린 손을 씻겨 주며 풀을 짓이겨 상처에 발라 주기도 했다.
사람들의 짙은 땀 냄새속에서 그의 하루는 저물어갔다.
사찰로 돌아오는 길, 원효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이들을 두고 떠나도 되는가.’ 마을 불빛이 점점 멀어지며 산길이 어두워졌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대웅전 앞 마당에 나란히 앉았다. 봇짐 옆에 쌓인 건조한 떡과 물주머니.
출발이 코앞이었다. “의상스님.” 원효가 뭔가를 다짐한 듯 단호히 말했다.
“가봅시다! 그럼.” 의상은 평소처럼 숨을 들이쉬고 합장했다. “사형과 함께라면, 이 길을 가는
의미와 목적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날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의상은 경전 목록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손때 묻은 두루마리를 꼼꼼히 세어보며 먼 길에 필요한 것들을 점검했다.
원효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돌렸다.
“스님, 이렇게 가시면 언제 다시 봬올지요?” 한 노파가 원효의 소매를 잡았다.
아이들이 둘러서서 손을 흔들었다. 원효는 소탈하게 웃었다.
“멀리 가도, 마음만은 언제나 여기 있는 셈이지요. 모두들 다시 봅시다.”
의상은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원효는 마치 이미 그 어떤 굴레에도 매이지 않은 사자의
몸으로 세상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기지개를 켜고 있는 듯 보였다. 사람들의 손길 속에서
한층 자유로워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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