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1권 《바람이 시작되는 곳》 - 제5장 함께 가는길(2)

qhrwk 2026. 4. 29. 07:31

 

제1권 《바람이 시작되는 곳》 - 제5장 함께 가는길(2)

 

제5장 함께 가는길(2)

문무왕 원년, 봄의 초입이었다.

지난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서라벌 남산의 골짜기에는 아직 그늘마다 흰 눈이 덩어리째 남아

있었으나, 햇살이 닿는 비탈에서는 봄기운에 녹은 얼음장 밑의 시냇물들이 아주 여리게

가느다란 실타래의 모습을 띠며 흘러 내리면서, 아직도 잠들어 있을법한 우직한 돌틈 사이를

날렵히 빠져 흘러갔다.

산 새들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목청을 풀 듯 간간이 맑은 소리로 울어 주고 있었고, 적막에

길들여져 얼어 붙은 듯 서있던 나뭇가지들도 비로소 바람에 조금씩 몸을 풀어가는 시기였다.

그 나지막한 남산자락을 뒤로 하고, 새벽녘 어슴프레한 안개를 헤치며 두 승려는 절 문을 나섰다.

다시 먼 길에 올랐다. 한때 그들은 북쪽으로, 고구려의 험한 변경을 넘어 요동으로 나아가는

육지 길을 좇은 바 있었다. 전란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성곽과, 의심 어린 눈빛으로 지나가는

이들을 가로막던 수라군들의 창끝을 가까이에서 본 기억이 아직도 언듯 언듯 발목을 잡듯,

잊혀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던 터였다.

이제 그 길은 전쟁, 의심 그리고 경계가 뒤엉킨 벽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더 이상 북녘으로 난 옛길을 꿈꿀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그들이 택한 길은, 들과 산을

가로지르되 끝내 바다로 닿는 서쪽의 길이었다.

서라벌에서 한강 하류를 향해 서북으로 굽이쳐 가는 길은, 진흥왕 대에 어렵사리 손에 넣은 새

영토를 따라 두 승려는 바쁘게 발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논두렁의 흙은 아직 찬 기운을 머금고

있었으나, 곳곳에 눌려 앉은 물자국 위로는 푸른 하늘빛이 조금씩 옅게 비춰졌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더 이상 막연한 ‘서쪽’이 아니라, 신라의 서북 끝에 자리한 하나의 지명,

하나의 국경선이었다. 당항포. 오래전 삼국이 서로 빼앗고 지키며 다투었던 바닷가의 중요한

요충지, 중국으로 통하는 문지방이자, 서해의 물결이 가장 깊게 육지 안으로 파고드는 곳.

그곳에서 배를 타면, 며칠 뒤에는 산둥의 해안과, 더 멀리 장안과 종남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릴 터였다. 그 주변 길을 오가는 상인들의 지게에는 당나라 비단과 약재, 낯선 서책들과

간간이 들려오는 낯선 소문들이 실려 있었다. 바람은 이미 바다의 냄새를 조금씩 실어와,

두 승려의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길섶의 마을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두 승려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허름한 회색빛 장삼과 낡은 삿갓, 등에 걸머진 보잘것없는 긴 봇짐 하나뿐이었지만, 그들의

걸음에는 스스로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음을 아는 자의 무게가 서려 있었다.

아이들은 먼지 일어나는 흙길 위를 맨발로 뛰놀다가도, 바다로 향하는 두 사람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겨우내 굳었던 흙이 풀리며 풍기는 흙내음과, 아직 차갑지만 하지만 어딘가

부드러워진 바람이 두 승려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서쪽 하늘은 불그스름하게 타올랐다가 이내 잿빛으로 가라앉곤 했다.

그 빛은, 아직 가 보지 못한 당나라의 궁성 지붕에 닿은 저녁놀과도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발아래에 펼쳐진 길과,

저 멀리 어렴풋이 상상만 되는 먼 나라의 길이,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실로 이어져

있다는 단순한 감각만이 그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날을 걸어 내려간

끝에 바다의 소리가 육지 깊숙이 스며드는 곳에 이르렀다. 진한 비릿한 냄새가 점점 코끝을

자극하고, 낮은 파도의 숨소리가 땅 밑에서부터 울려 올라오는 듯한 지점, 그곳에 당항포가

있었다. 바다와 육지가 맞부딪치는 경계, 신라의 흙길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서는 자리. 거기서부터는 말발굽도,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직 물길만이

서쪽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두 승려는 포구의 끝자락에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

한 사람은 저 너머의 대륙을 바라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지금까지 밟아온 길을 돌아다보았다. 

아직 배는 떠나지 않았고, 파도 역시 그리 높지 않았다. “오래전 육지의 길은 우리의 길을

막았었으나, 바다의 길은 이제 우리를 보내주려는가 봅니다.” 의상이 잔뜩 희망에 찬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 당행에서 고구려 변방의 수라군들에게 붙잡혀 ‘첩자’로 의심받고,

모욕과 조롱 끝에 겨우 살아 돌아온 기억이 발걸음마다 되살아났다. 원효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가 보오. 길이야 뭐 어디 따로 있겠소. 우리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라면 거기가 곧 길인

것이죠. 하하하...” 두 사람은 바다가 멀리 보이는 산둔턱에 봇짐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돌리고 있었다.

원효가 멀리 수평선을 지긋이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우리가 선재동자와도 같구려..

하하하...선재동자의 구법 여행은 물리적으로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화엄의 관점에서 보면, 그 여정은 '단 한 찰나의 깨달음’, 즉 일념(一念)을 무한히

확장하여 보여준 것입니다.

선재동자가 마지막에 미륵보살의 비로자나장엄장누각(毘盧遮那莊嚴樓閣)에 들어갔을 때,

그동안 만났던 모든 선지식과 닦았던 모든 수행이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찰나(彈指)에

동시에 펼쳐지지 않았습니까?

오십 세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닌 그 기나긴 세월이 사실은 깨달은 마음의 한순간 속에 모두

녹아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의상은 순간 흠칫 놀랐다. 화엄경에서 묘각(妙覺)의

경지에 오른 찰나제(刹那際) 삼매의 선정에 든 보살 경지의 이야기였다. 원효는 말을 이어갔다.

“미륵보살이 손가락을 튕기자 누각의 문이 열립니다. 그 안에는 무한히 넓은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중첩되어 있지요. 중중무진(重重無盡).... 선재동자는 그 찰나의 순간에 자신이 모든

선지식을 만나는 모습과 공양 올리는 모습, 미래에 성불하는 모습까지 동시에 보게 되지요...

아주 짧은 순간, 찰라의 순간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인과(因果)가 한자리에서 걸림 없이

무애(無碍)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선재동자가 보현보살님을 만나 '보현행원'을 세우며 여정을 마칠 때...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지치지 않는 수행, 끊임없는 수행'으로 승화되는 것이외다... 한 찰나에

모든 불국토를 보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지요."

원효가 불쑥 화엄경의 이야기로, 앞으로 펼쳐질 멀고도 긴 여정의 서로의 수행의 깊이를

더해갈 마중물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의상은 순간 말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사형께서 하시는 말씀 속에는 지금 이 순간의 찰나 속에 영원이 있고, 그 영원한 시간

동안 수행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평온한 깊은 마음속에 머물고 있어야 한다는 뜻을

이야기 하신 것인가?...’

순간 알 수 없는 의문에 빠져 들었다. 그때 원효는 바다를 바라다보던 시선을 의상 쪽으로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길 위에서 보낸 모든 순간 순간이 곧 가고자 하는 목적지였음을

깨닫는 힘이라는... 그리고 ‘수행의 시작이 곧 깨달음의 끝(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

時便正覺)'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저는 언제나 밝게 알 수 있을런지요..."

땅 바닥의 모래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해치며 원효는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 오십 세명의 선지식을 찾아 헤맨 '선형적(線形的) 시간'이 사실은 미륵보살의 손가락

퉁기는 한 '찰나'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입법계품〉의 결론을 원효는

미리 의상에게 던져 보이면서 먼 훗날 의상의 수행의 결과를  미리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한

이야기를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