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장 복회(福會) (2)
늘 진솔하고 조용한 모습과 태도를 보여왔던 불자 여정화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정화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맑았다. “저는 제 삶이 온통 실수와 후회뿐인 듯하여, 이 탑을 돌 때마다 ‘또 같은 과보를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마음뿐입니다. 이런 마음도 인연의 한 흐름이겠지요? 제가 며칠 전 읽었던 인과경(因果經)에서는 탐욕과 진심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나치게 집착하고, 막무가내로 헛된 욕심과 고집을 부리면, 다음 생엔 그 집착과 고집 때문에 거친 뿔이 둘 달린 소로 태어난다고 되어 있었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자상한 마음을 가지신 혜명 스님께서 답을 하셨다. “돌이켜 보아, 여러 행했던 일들 중에, 그 일들을 후회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이미 이전과는 다른 인(因)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그 와중에 끊임없이 그 마음을 넉넉하고 착하게 쓰려고 노력하다 보면(善用其心), 그 과보(果報)의 과일도 현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익어갈 수 있지요.” 잠시 서로 대화하던 것을 멈추고, 모두 한동안 탑돌이에 집중하였다. 그 사이로 얼마간 침묵이 흘렀고, 그들의 머리 위로는 저녁 별들이 아래로 쏟아질 듯 가득 하늘을 수 놓고 있었다.
한참 뒤, 고구려에서 온 상인 각화가 불쑥 정적을 깨고 말을 꺼냈다. “저 먼 서역 장터에서 별을 바라보며 길을 찾을 때도, 저는 하늘이 큰 탑 같다고 느꼈습니다. 대단한 서역 땅이었죠. 사실 이곳에서의 탑은 서역와 저희 고구려에 비하면, 아주 작은 하늘 같고요... 하하하” 넓은 골격의 어깨를 드러내며, 으스대듯이 히죽히죽 웃으며 밉상스럽게 말했다. 그때 유학자 중익이 수염을 한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유학에서는 하늘을 도(道)라 하여, 이(理)가 만물에 스며 있다고 말하오. 오늘 이렇게 탑돌이를 하며 생각해 보니, 하늘의 이치와 부처님의 법이 서로 다르지 않은 듯 하구려...”
다시 또 대화에 불이 붙었다.
혜명 스님께서 약간은 짜증이 썩인 말투로 대답하셨다. “이(理)라 부르건 도(道)라 부르건, 인연 따라 생겨나는 모든 일은 공허할 뿐이오. 모두 다 한마음에서 나오니 이름만 다를 뿐인 것입니다.” 그때 법연 스님께서 질문을 이어갔다. “스님, 인(因)은 씨앗이고 연(緣)은 그것을 돕는 조건들이라 들었는데, 오늘 탑을 돌다 보니, 무엇이 씨앗이고 무엇이 조건인지 점점 구분이 흐려집니다.”
질문의 내용이 깊어 지고 있었다.
원진 스님께서 들고 계시던 연등이 무거우신 듯 옆 사람에게 잠시 맡기시고는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인과와 인연을 나누어 보되, 점점 공부가 익어가다 보면 인이 곧 연이 되고, 연이 곧 인이 됨을 알게 되지요. 스님 발걸음 하나하나가 스님 마음의 인이면서, 더불어 이 모든 탑, 이 모든 사람들의 합장과 염원이 모두 연이 되는 이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여정화가 의구심을 가지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사실 제가 여기 나온 것도 가난과 병고 때문이며, 그 때문에 처음부터 절에 의지한 인연인데… 이 고통을 참고 견뎌내면 저뿐만 아니라, 언젠가 누군가에게도 좋은 연이 될 수도 있을까요?”
이윽고 혜명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고통을 알아본 자는 이미 남의 아픔을 헤아릴 씨앗을 지니게 된 것이지요. 오늘 밤의 따듯한 마음의 기원에서 흘러나오는 연민의 눈물 한 방울이, 훗날 누군가의 괴로움의 아픔을 덜어주는, 혹은 대신 그 고통을 모두 받기를 원하는 보살행을 할지도 모릅니다.”
행렬이 탑의 북쪽을 돌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 등불이 크게 흔들렸다. 빛과 그림자가 탑 몸체에 어지러이 겹쳐져 보였다.
“상인으로 길을 떠날 때는, 저의 발밑의 이익만을 계산했소. 그런데 오늘은 저 심연의 하늘과 별빛이 한 장의 비단 같아 보이니… 이익과 손해를 따지던 저의 마음이 조금은 부끄럽군요.” 고구려 상인 각화가 갑작스런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진심의 참회도 이어졌다.
여정화도 조용히 독백에 가까운 말로 참회했다. “저도 그동안 제 마음을 가는 실이 들어갈만한 바늘구멍만큼만한 여유만을 두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곤 했습니다. 오로지 저만을 아꼈던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잊어버리고서, 저의 마음을 좁은 구석탱이에 다가 잡아 가두어 두었었나 봅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수십 번에 걸친 사람들의 회한과 참회, 그리고 새로운 기원과 염불이 조금씩 잦아들고, 스님과 신도들이 탑 앞마당에 둘러앉았다. 탑 그림자가 사람들 사이로 길게 드리운다.
혜명 스님께서 한사람 한사람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이제 각자의 서원을 회향하는 시간입니다. 한참을 돌고 돌아온 이 발걸음을, 어디로 돌려 회향하고 싶으신지요?”
여정화가 제일 먼저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했다. “저는 오늘 돌며 깨달았습니다. 제 수행의 과보를 제 몸 하나의 안락으로만 삼을 수 없다는 것과, 제가 얻는 작은 깨달음이라도, 미혹한 이들의 두려움을 덜어주는 인(因)이 되기를 간절히 서원합니다. 그리고...저는 제 슬픔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향해 손 내밀 수 있도록 이 좁은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합니다. 제 눈물이 누군가에게는 ‘너 혼자가 아니다’라는 위로의 신호가 되는 과보로 돌아가길 간절히 기원하며 회향하고 싶습니다.”
혜명 스님께서 감동하신 듯한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훌륭하십니다. 보살님.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말씀하시기를, 연(緣)이 없는 청정한 인자함이 있으니, 곧 보살의 ‘생사를 여읜 성품’에 들어가는 연고이니라(無緣淸淨慈 入於菩薩離生性故)고 하셨고, 고달픈 줄 모르는 청정한 가엾이 여김이니, 일체중생을 대신하여 괴로움을 받아도 힘들어하지 않는 연고이니라(無疲厭淸淨悲 代一切衆生受苦 不以爲勞故)고 하셨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고달파하거나 피곤해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심지어 일체중생의 고통을 대신해서 받아도 결코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사랑은 자신들의 혈족이나 누군가와 깊은 정이 들었을 때만 주로 나타나지만, 보살의 인자함은 그와 같은 인연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는 말씀이지요.”
각화는 숙연해진 마음에서 한마디 거들기 시작했다. “저는 장사판에서 이익만 따지던 인연을 이제 조금 바꾸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한 번 더 ‘깎아주는’ 손길이 되어서...헤헤...언젠가는 다른 이에게 자비로 이어지는 연(緣)이 되길 바랍니다. 사실 지난번 강주 스님을 찾아뵀을 때, 저의 이기적인 마음을 미리 알아 꿰뚫어 보셨는지... 저를 경책하시며 하신 말씀을 마음속 깊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삼일 간 딲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三日修心 千載寶), 백년 간 탐한 재산은 하루아침의 먼지로다(百年貪物 一朝塵).’라고 하시면서, ‘보살에게는 일체 소유를 무엇이든 다 버려서 보시하는 것으로 청정한 기쁨(悉捨所有淸淨喜)을 삼는다’는 화엄경에 있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베풀고 나누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그리고 좋은 것을 많이 베풀수록 기쁨은 더 커진다’고 말씀하셨어요...그때는 사실 잘 이해가 안되었는데...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저에게 딱 맞는 말씀이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어 보였지만, 제법 그럴싸한 회향을 하였다.
중익도 이야기를 거들었다. “지난달 초하루 법회 후 주지 스님께서 읽어 보라고 주신 신심명(信心銘)에 이런 글이 있었어요.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夢幻空華 何勞把捉)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得失是非 一時放却)’ 저는 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도를 말하면서도 삶 속에서는 번번이 저의 이익만을 좇았소. 그리고 남들로 부터 받은 쇠(衰)ㆍ훼(毁)ㆍ기(譏)ㆍ고(苦)에 늘 마음이 흔들려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곤 했었죠. 오늘 탑돌이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인과와 인연의 그물망을 잊지 않고, 나와 남을 가르는 좁은 마음을 조금씩 놓아보려 하오. 유가의 인(仁)도, 불가의 자비도, 결국 사람을 살리는 한마음이겠지요.”
팔풍(八風)중에 4위(違)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중익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참회하면서 더욱 맑아진 자신의 마음을 회향하였다.
이어지는 회향의 모습을 보고 있던 원진 스님께서 조용히 눈을 감고 합장하며 마음에 있는 말씀을 하셨다. “이 모든 깨알 같은 서원들의 회향이 곧 여러분들의 마음의 여래장(如來藏)의 씨앗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 이러한 복회에서의 회향을 수순함이 곧 복덕의 도를 돕는 방법입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중생들을 교화하고 중생들을 보살피는데 그 마음이 고달프지 않는 것(心無疲倦 是菩薩福德助道具故 究竟度脫一切衆生)이 큰 복이 되어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설령, 우리가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오랜 세월 보내며(假使頂戴經塵劫), 부처님을 위해 내 몸이 의자가 되어 온 세상 놓아 드려도(信爲床座偏三千), 오늘 우리가 배우고 깨우친 부처님의 법(佛法)을 전하고 회향해서 중생을 깨우치게 하지 못하면(若不傳法度衆生), 높고 넓은 부처님 은혜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畢竟無能報恩者).
씨앗은 땅에 묻어야 싹이 나듯, 우리도 각자의 삶이라는 흙 속에서, 본인들이 깨우치거나 혹은 그러지 못하고 지식으로 알고만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마음껏 전하기를 서원하고 실천해 봅시다. 그리고 오늘 밤 탑을 돌며 쌓은 공덕을, 일체 모든 중생들의 아픔이 모두 소멸 되어 안락(安樂)한 삶을 살아가길 기원하며 널리 회향합시다.”
원진 스님의 마지막 발원에 모두가 함께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깊이 기원하며 합장했다.
탑 위의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리어 맑게 들렸고,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징소리가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먼 하늘에 떠서 밝게 비추어 주던 달빛도 점점 그 모습을 감추어 가고 있었다.
인과(因果)와 인연(因緣)의 솔직담백한 이야기와 진심의 참괴(慚愧), 서원의 탑돌이가 마무리되어 가면서, 이날의 서원들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던 서라벌의 사람들에게 원만히 회향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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