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장 천의(天意) (2)
다음 날, 서라벌의 세계도 그대로였고, 새벽종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울렸다. 절간의 기와 위로 밤비가 말라가고, 승려들은 늘 하던 대로 물을 길었다. 그러나 원효는 그 종소리가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종은 울렸으나, 그는 더 이상 ‘불려가는 자’가 아니었다. 그의 발은 저절로, 절문 밖을 향해 있었다. 마주친 사미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스님.” 그 말이 낯설게 들렸다. 원효는 멈춰 서서 잠시 사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비난도, 호기심도 없었다. 그저 예전과 같은 진심의 공경만이 머물러 있었다. 원효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이름은, ‘어제까지의 나’를 부르는 말이다.”
사찰 문을 나서자 아침 장이 이미 열리고 있었다. 닭이 울고, 아이들이 달리며,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욕을 해댔다. 누군가가 자기의 물동이에 물을 담을 두레박에 해코지를 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이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원효는 그제야 알았다. 어제까지 그는 이 세계를 건너다보는 자였고, 이제는 이 세계 안에 서 있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는 그를 파계승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미친 자라 불렀다. ‘파계승...선생님.... 여보게도 좋다...그런 경계를 버려야 마음도 편하지 않겠나...’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 법은 낮아졌고 사람은 높아졌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불교는 그와 더불어 비로소 ‘사람’ 곁으로 내려왔다. 원효는 스스로를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낮춘 선택을 한 것이다. 누군가의 입에서는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회자 되곤 했다. 그는 혼잣말로 “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고, 사람이 법을 위해 죽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은 그 어떤 권위의 왕실에도, 승단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그는 의도적으로 ‘고승’의 경계를, 그 이름을 놓아버린 일이었다. 계율을 어겼기 때문에 세속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세속으로 내려오기 위해 계율을 넘은 것이다. 부처는 고요히 미소 짓고는 원효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잘했다, 원효야. 드디어 ‘나’를 벗어났구나. 드디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어!”라고 하시며, 금빛의 밝고 밝은 부처의 모습이 원효의 머리위로 떠오르며, 원효의 이마를 자비로이 어루만져 주시며 수기를 주셨을 것이다.
이후 원효는 황룡사 고승들이 주도하고 있는 ‘왕실 승단’을 떠나고 ‘속인 아닌 속인’과 어울리고 노래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시장에서 설법했다. 고승의 자리를 버리고 중생의 자리로 돌아가 중생과 같은 높이에서 웃고 울며 말하기 위해 그는 ‘모든 이를 위한 수행자’가 되기로 선택한 순간이었다. 욕망이 아니라, 그는 이미, 깨달음이라 불리던 자리에서 조용히 발을 떼고 있었다.
한나절이 지나고 서라벌의 저녁녘, 늘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는 냄새로 시작되었다. 불을 지핀 연기보다 먼저, 국을 데우는 냄새보다 먼저, 사람들의 목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오늘도 쌀이 모자라겠네.” “어제보다 더 올랐다지?” “그래도 안 먹을 수는 없잖아.” 장터 어귀에서 생선 상인이 투덜거리자, 옆에서 채소를 늘어놓던 여인이 바로 그 말을 받았다. “당신만 그래? 우리도 새벽부터 나왔어.” “새벽에 나와서 뭐가 달라져?” “그래도 안 나오는 것보단 낫지.” 그 말에 상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생선을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그 말은 위로도, 체념도 아닌 단순히 이 순간만큼 만을 넘기기 위한 말이었다. 우물가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물 긷는 여인은 두 손으로 두레박을 잡고 앞사람의 등을 보며 말했다. “어제는 아이가 밤새 울었어요.” “또 열이야?” “아니요. 그냥… 울더라고요.” “애들은 이유 없이도 울지.” “그렇겠죠...” 여인은 덤덤히 그렇게 말했다. 두레박이 올라올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내가 이렇게 피곤했나? 얼굴이...” 누가 들을까 봐 아주 작게 말했다. 뒤에서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다 그래요. 저녁엔 다들 그렇게 보여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 말 역시 위로도, 불평도 아닌 말이었다. 골목 안쪽에서는 아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얘야, 좀 조용히 해.” “어젯밤에 먹인 게 체했나?” “아니면 또 이가 나는 건가.”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계속 말을 걸었다. 다만 지금 여기에 누군가 옆에 있어서 자기들의 말과 생각을 받아 주기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각자의 삶을 자기들만의 방향으로 밀어내는 힘으로 서라벌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장터 끝자락에서 한 사람이 잠시 멈췄다. “저기, 스님 아니야?” “어디?” “저기… 저기 서 있는 사람.” 사람들이 힐끗 보았다. 헐렁한 옷차림, 빗질하지 않은 머리, 해진 삼베옷, 그러나 걸음은 이상하리만치 느렸다. “절에서 나온 분 같진 않은데.” “그럼 뭐야?” “글쎄… 그냥 스님 같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보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서라벌 저잣거리, 먼지 풀풀 날리는 길목에 노점상과 술꾼, 거름뱅이 할 것 없이 모두 거기로 모여들었다.
원효는 거친 삼베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허리에 찬 호리병 모양의 무애박(無碍壺)을 툭툭 두드리며 중앙으로 튀어나왔다. 그의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얼룩졌으나 눈빛은 장난기 어린 광채로 반짝였다. “중생과 부처의 거리가 너무 멀구나. 아득한 거리를. 그대가 기뻐서 두 팔을 이렇게 흔들고, 마음의 장애를 털어 버리듯, 덩실덩실 다리를 들었다 놓아 춤을 추면. 부처님이 잠을 깨고 벌떡 일어나지! 어화둥둥 나무 아미타불!” 원효가 목청껏 소리치며 박을 흔들자, 금빛 방울 소리가 쨍그랑 쨍그랑 퍼졌나갔다. 군중이 깔깔 웃으며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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