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장 무사지공(無私至公) (2)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이미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고, 마한의 사찰들이 불타고 있는 형국이었다. 김유신이 문무왕을 보며 무겁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당나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백제까지 삼켰습니다. 이제 신라마저 병탄하려 하고 있습니다. 소정방이 그들의 황제에게 올린 표문에 따르면 이미 우리를 ‘최후의 적국’이라 칭하며 군사를 집결했습니다.” 문무왕이 창밖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당나라의 속셈이 뻔합니다. '불법의 나라'를 평정한다며, 우리 백성들의 마음 까지 꺾으려 하고 있어요. 이미 백제 도선사(道詵寺)의 불상이 강물에 떠내려갔고, 고구려의 정릉사(定陵寺)까지 군화에 짓밟혔다고 합니다.”
문이 벌컥 열리며 법민(法敏) 스님이 급히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먼지 쌓인 불경 한 권(卷)이 들려 있었다. “장군들, 당나라 군사들이 마한의 사찰들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불상을 지키려다 당나라 병사들에게 찔려 죽었다고...” 김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황산벌까지 사흘 거리요. 당나라 군사가 이리로 오면 서라벌은 함락되고, 신라의 불법도 함께 무너질 것이오.” 문무왕이 칼자루를 쥐며 말했다. “내가 당군을 막겠소. 황산벌에서 끝장을 보십시다!”
법민이 불경을 가슴에 꼭 끌어안으며 끼어들었다. “칼만으로 불법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숭봉불법(崇奉佛法)하고 수호방가(守護邦家) 하자고 하시던 일상의 말씀을 따라 나라를 지키려는 백성들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리 당나라가 불상을 부숴도, 이 불법의 뿌리는 살아있습니다.” 김유신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맞소. 지금 필요한 건 칼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을 분이오. 원효 스님을 찾아야겠소.” 문무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스님께서야 말로 불법의 본질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장터에서도 산속에서도 모든 이의 마음을 움직이시지요.” 법민이 조용히 덧붙였다. “지금 원효 스님께서 서라벌 외곽의 주막에서 당나라 소식에 떠는 백성들을 다독이고 계신다고 합니다.” 김유신이 단호히 말했다. “바로 그분이 필요하오. 나라가 무너질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 마음, 모든 사사로움을 떨쳐내고 모두가 무사지공(無私至公)의 지혜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오.”밖에서는 바람이 거칠게 불어왔다. 횃불의 그림자가 방 안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하나의 방향, 서라벌 외곽 주막으로 모아졌다. 서라벌의 밤하늘, 한 줄기 별빛이 주막 쪽을 향해 길게 비쳤다.
서라벌 왕궁의 대전, 횃불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밤이었다. 김유신 장군과 문무왕, 대신들이 급히 모여 긴급한 회의를 열고 있었다. 탁자 위엔 황산벌 지도와 당나라 군대 배치도가 펼쳐져 있었다. 문이 열리며 원효가 들어섰다. 그의 가사는 먼지투성이였고, 손엔 아직 장터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대신들이 웅성거렸으나, 문무왕이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문무왕이 먼저 물었다. “원효 스님, 백성들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황산벌을 넘어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원효가 지도 위 황산벌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폐하, 지금 필요한 건 세 가지입니다.” 대신들이 숨을 죽였다. 원효가 첫째 손가락을 세웠다. “첫째,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전쟁은 칼의 일이지만, 나라의 뿌리는 백성의 목숨이오. 황산벌에서 싸우되, 마을과 논밭은 지켜야 합니다.”
김유신이 끄덕이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원효가 답했다. “나룻배를 동원해 백성들을 산으로 피난시키시오. 여인과 아이들부터 먼저 보내고, 늙은이와 병자들은 마을에 남겨 약초와 곡식을 비축해 두시오. 당나라가 마을을 불태워도 굶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문무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나루터에서 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원효가 둘째 손가락을 세웠다. “둘째, 군대의 마음을 다잡으십시오. 병사들이 가족 걱정에 휩싸여 있다면 그들이 마음을 내어 싸울 수가 없습니다. 각 부대마다 장군께서 직접 다녀오셔서 ‘가족은 우리가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진실하게 말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김유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시간이 없습니다. 당군이 사흘 내로 처들어 올 겁니다.” 원효가 단호히 말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떠나시오. 전령을 보내 각 고을의 마을 노장들과 촌장들에게 ‘서라벌에서 명을 내렸다. 가족을 지켜라’고 전하시오. 병사마다 집안 생각을 덜어야 전장에서 힘껏 싸울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신 한 명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스님, 백성들이 도망치기만 하면 군대가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원효가 웃으며 세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셋째, 백성들이 군대를 믿게 하시오. 피난 가는 백성들에게 각자 보리 한 되와 짚 세 뭉치를 주시오. ‘이것은 군대가 너희를 지키는 대가다’라고 말입니다.” 문무왕이 놀라 물었다. “곡식을 나눠주면 군량이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원효가 지도 위 서라벌 창고를 가리켰다. “창고에 쌓인 곡식은 백성의 피땀입니다. 지금 나누지 않으면 당나라가 모두 다 태워버리게 되오. 백성들이 군대를 위해 곡식을 내준다면, 병사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싸울 것이오.” 김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참으로 백성들과 군사들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훌륭한 계책입니다.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대신 하나가 여전히 걱정스레 물었다. “스님, 만약 당나라가 마을까지 밀고 내려오면 어찌합니까?” 원효가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는 제가 나서겠소이다.” 문무왕이 놀라 물었다. “스님께서 전쟁터에 나서겠다는 말씀입니까?” 원효가 웃으며 답했다. “전쟁터가 아닙니다, 폐하. 전쟁터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한곳에 모이는 곳이지요... 당나라 병사들도 사람인 법, 마음이 흔들리면 칼이 무뎌지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쟁터에서 힘껏 써서(用) 이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야 할 때입니다.” 김유신이 단호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백성들의 피난, 군심 다잡기, 곡식 나누기, 말씀하신 것들을 어서 빨리 모두 시행하겠습니다.” 원효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한 가지가 더 있소이다. 승병을 불러야 하오. 각 사찰의 주지 스님들께 서신을 서둘러 보내 주십시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대전 안이 숙연해졌다.
원효의 말이 방 안을 채우며 모여 있던 대신들의 마음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순간 생각에 잠긴 후 원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삼세에 노닐며 평등하게 보고, 시방에 현신하며 법계에 두루 돌아 만물을 구제하고, 미래가 다할수록 새로워지는 바로 이것이 마음의 활용법인 용대(用大)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마음만 제대로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김유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용대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원효가 미소 지었다.
“탐욕의 마음자리에서 원력과 희망으로 전환하는 것이오.” 원효가 창밖 별들 아래 손을 펼치며 말했다. 원효가 주막의 백성들 얼굴을 떠올리며 말하기를 “저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보시오. 그들은 자기 손해를 생각하며 분노하고, 자기 목숨만 걱정하는 마음에 갇혀 있소. 그러나 바로 그 마음자리, 그 욕망 속에서 그들이 방향만 바꾸어 원력으로 화(化)하는 법이오.”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보이면서 천천히 말했다. “소유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존재하려는 희망으로 전환하는 순간이오. 고통을 모르면 진여가 드러나지 않듯, 지금 이 위기의 두려움을 자각할 때 비로소 범부의 원력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백성들이 자기 아픔을 깨닫고 서로를 위해 일어설 때, 그게 바로 부처님의 용대(用大)인 것입니다.”
문무왕의 눈에 불꽃이 이는 듯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칼이 아니라, 이 백성들의 마음을 원력으로 바꾸는 불씨군요!” 문무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원효 스님께서 알려 주신 비책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신 것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제 각자 맡은 바를 사심 없이 행해야겠소이다.” 원효는 조용히 합장하고 문을 나섰다. 밖의 어두운 밤공기 속에서도 밝고 맑게 빛나고 있던 별빛은 황산벌을 향해 길게 이어졌고, 무한히 펼쳐진 법계 또한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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