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7권 《생사자재》 - 제8장 법왕자(法王子)

qhrwk 2026. 5. 15. 20:34

 

제8장 법왕자(法王子)

 

그날의 하늘은 늘 그렇듯 거대하고 무심했다. 서녘으로 기우는 해의 노을은 하늘을 그림처럼 물들게 했다. 분홍빛과 주황빛, 그 사이를 스며드는 희미한 보랏빛이 서로를 밀어내며 하루를 감싸 안았다. 해가 떨어지는 그 자리에는 그림자만 남아 고요히 풀어져 내려앉았다. 산 아래 길가의 바람은 풀 냄새와 흙먼지, 삶의 땀과 죽음의 젖은 냄새를 한데 얽어 원효의 발자국을 따라가고 있었다. 장례가 막 끝난 자리였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걸리의 쉰내와 향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누군가는 상주의 손을 붙들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등 뒤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원효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전장(戰場)에서 죽은 사람들의 자리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음을 안 때문이 아니라, 그 또한 생멸의 한 변주(變奏)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효의 눈엔 허탈한 상주가 흙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모습이 흡사 길 위 흙먼지 속에서 죽음이 남긴 체온을 손으로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수십 명의 숨결이 뒤엉킨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어 내고 있었다. 바람은 주막의 천막을 흔들며 지나가 산등성이를 스쳤다.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다만 풀 냄새와 땀 냄새를 섞어 나를 뿐이었다. 살아남은 상주는 아이를 부르며 떨리는 손을 뻗었고, 거리는 이미 온기를 잃고 있었다. 원효는 장례가 끝난 그 길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그의 발밑으로는 사람들의 발자취가 뒤섞인 흙이, 그 위로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바람이 떠돌고 있었다. 장터의 끝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술 냄새가 새어 나오는 주막의 문, 다른 하나는 방금 닫힌 장례 터의 문이었다. 웃음과 울음이 등을 맞대고 있는 곳, 그 사이에서 공기는 묘하게 얽혀 있었다. 상주는 누군가의 이름을 더듬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웃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고, 아직 마음속 울음이 가라앉지 않아 침묵만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 편히 쉬세요”라는 주변의 말 한마디에도 상주는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떨었지만, 눈가의 물기가 말라붙은 채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주막 안에서는 누군가 크게 웃었다. 과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불경하지 않았다. 삶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내며, 그 빈 자리를 채우며,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가려고 하는 것. 원효는 문턱에 앉았다. “누군가 떠난 자리는 한동안 텅 비어 있지요. 그러나 떠남과 머묾은 서로 등을 지지 않아요.” 머리속에선 화엄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보살이 원행지(遠行地)에 머물러 생멸 자재를 얻어 모든 법이 자유로이 왕래함을 깨닫나니...’ 울음과 웃음, 떠남과 머묾이 한 흐름으로 자유롭게 오가는 원행(遠行)의 자리. ‘과거, 미래, 현재의 일체 중생의 받아 난 몸이 곧 소멸하는 것을 보고 문득 생각하되(爾時 菩薩 觀去來今一切衆生 所受之身 尋卽壞滅 便作是念), 이상하다, 중생이여,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생사(生死)하는 속에서 수없는 몸을 받지마는(奇哉 衆生 愚癡無智 於生死內 受無數身) 위태하고 연약하여 머물러 있지 못하고 속히 소멸하는데(危脆不停 速歸壞滅 若已壞滅) 만약 이미 소멸하였거나 지금 소멸하거나 장차 소멸할 것이거늘(若今壞滅 若當壞滅) 마침내 견고하지 못한 몸으로써 견고한 몸을 구하지 못하는구나(而不能以不堅固身 求堅固身)...’

 

수많은 선지식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선지식은 일체 중생들이 스스로 그 받은 몸이 빨리 괴멸(壞滅)한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신기하게도 어리석고 무지하여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이 몸은 위태롭고 연약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 것이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이 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문제에서 중생들은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허망한 육신으로서는 견고한 법신을 구할 수 없는데도 육신에만 매달려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관찰하고 일체 지혜를 증득하여 중생들이 무너지지 않는 법신의 이치를 설법하여 가르쳐야 한다...

 

화엄경의 말씀데로 ‘내가 마땅히 모든 부처님이 배우신 것을 모두 배우며(我當盡學諸佛所學) 일체 지혜를 얻어 일체 법을 알고는(證一切智 知一切法)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삼세(三世)에 변함없이 평등한 적정을 따르는 무너지지 않는 법의 성품을 설하여 주어(爲諸衆生 說三世平等隨順寂靜不壞法性) 그들로 하여금 편안한 쾌락을 얻게 하리라(令其永得安隱快樂)...’ 괴멸하지 않는 법성(法性)이 참다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영원한 안락을 얻게 될 것이다. 한순간에 괴멸하고 마는 이 육신을 벗어나서 영원히 괴멸하지 않는 법성(法性)의 자리에서 영원히 편안하고 쾌락한 삶을 얻게 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환희(歡喜)하게 하는 것이다... ‘몸도 또한 부처가 아니고 부처도 또한 몸이 아니지만(身亦非是佛 佛亦非是身) 다만 법으로 몸을 삼아 일체 법을 통달하도다(但以法爲身 通達一切法)’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새기고 알려야겠다.” 원효는 잠시 침묵한 후 말씀을 이어갔다.

 

“아함경 바카리경에 한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라자그라하 죽림정사에 계실 때 바카리라는 비구가 중병에 걸려 임종할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뵈옵고 예배드리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 달려오시자 누워있던 바카리가 일어나 예배를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바카리의 손을 잡아 자리에 누이시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바카리야, 이 썩어질 몸을 보고 절을 해서 무얼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원효는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아픔을 부처님 말씀으로 어루만져 살피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는 죽음이 사라진 자리이면서, 삶이 다시 숨을 얻는 자리입니다! 거기엔 영원히 끊어진 것도, 완전히 이어진 것도 없습니다. 단지 흐름이 있었고, 그 흐름 위에 한 사람의 고요가 놓여 있을 뿐입니다.” 원효는 그 모든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실로 생과 사는 맞서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비추며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사라질 수 없는, 그리고 새로 태어남도 없는 바로 청정한 참모습 그 자체임을 말씀하고 있었다.

 

원효는 그 앞에 서서 오래 바라보았다. 죽음이란 끊어짐이 아니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비스듬히’ 넘겨지는 호흡의 옮김임을 느꼈다. 누군가의 끝이 누군가의 시작이 되고, 그 끝과 시작이 맞닿은 그 순간에는 ‘끝도 시작도 아닌 자리’가 생긴다. 그 자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그가 서 있는 곳이라는 확신이 차올랐다. “생사란 두 줄의 길이 아니며, 또한 서로 마주 보는 두 강도 아니고, 마치 한 물줄기가 굽이치며 다시 스스로에게로 돌아가는 흐름과도 같은 것이구나...”원효는 그 순간, 흙 위에 내려앉은 빛 한 줄기와 그 위를 스치는 그림자를 함께 보았다. 빛과 그림자는 서로를 가르지 않았고, 한 몸이 되어 움직였으며, 서로의 자리를 바꾸며 흘렀다.

 

그야말로 가유(假有)는 유(有)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무(無)에 의해 흐트러지지 않고, 가무(假無)는 무(無)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유(有)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며, 유(有)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므로 가무(假無)는 완연히 존재하고, 가유(假有)는 무(無)에 의해 흐트러지지 않으므로 가유(假有)는 완전히 없다는 원효의 말씀이었다.

 

원효에게 보여진 그 모습은 자연의 공평무사한 본능적 마음으로서의 진여본성(眞如本性)으로 회심하는 곧 법계(法界)의 원리이자 무위적(無爲的) 작용임을 직관하고 있었다. 삶이 죽음을 낳고, 죽음이 삶을 다시 일으키는 그 무한의 상즉(相卽).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 속에서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는 고요. 그 고요 속에서 원효는 속삭이듯 마음으로 되뇌었다. “생사와 마음, 둘이 아니다. 있는 곳마다 법이 드러나고, 드러남마다 공(空)이 함께 일어나니, 이 흐름 자체가 곧 도(道)로구나.

 

화엄경에 ‘일체 법이 난 일도 없고 또한 멸함도 없나니(一切法無生 亦復無有滅)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여래를 보게 되리라(若能如是解 斯人見如來)’고 하셨고, 모든 법이 난 일이 없으므로 자성도 있는 것이 아니니(諸法無生故 自性無所有) 이와 같이 분별하여 알면 이 사람 깊은 이치 통달하리라(如是分別知 此人達深義)’고 하셨다. 모든 존재의 불생불멸의 이치를 깨달으면 곧 여래를 본다는 말씀이다...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도 ‘모든 법은 여러 가지 모습(千差萬別)이나, 곧 한 자리(一位)에 포함된다, 모든 법은 비록 달라도, 일승(一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諸法雖異 不出一乘)’고 하셨다... 불생불멸의 근본 이치를 말씀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모든 법은 생긴 것이 아니므로 고정 불변하는 자성도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치를 아는 사람은 곧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깊은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질그릇과 흙먼지의 관계처럼, 본질적으로 서로 상통한 이치를 들어서 바라보는 이치(理)의 문인 진여문(眞如門)과 이들의 관계에서 서로 현상적으로 상이한 점을 들어서 설명해 가는 사실(事)의 세계인 생멸문(生滅門)은 본질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생멸문에서 이미 진여문의 본질이 변하지 않은 채로 현존해 있는, 바로 독정(獨淨)하고 담연(湛然)한 사실에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다.” 원효의 깊은 사유가 이어졌다.

 

짐승 울음인지, 바람인지 모를 소리 들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 울림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모든 울림은 제 자리를 찾아 스스로 흘러 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마음 한가운데 ‘길’이 일어났다. 어디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모든 방향이 스스로 한마음(一心)으로 ‘회귀’하는 길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는 걸음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이른 걸음이었다.

 

“오고 감이 따로 있지 않다. 멀리 간 사람도, 여기 남은 나도 지금 이 자리 안에서 서로를 비추고 있다. 생사의 호흡을 자유로이 오가며, 법신불(法身佛)의 보이지 않는 공덕인 ‘공(空)의 대자자비(大慈慈悲)’를 몸으로 증명하는, 자수용신(自受用身)으로서의 보신불(報身佛)이자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서의 화신불(化身佛)인 것이다. 세상이 공(空)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비어 있음’ 속에는 여전히 서로의 체온이 같이 남아 있는, 공(空)의 자비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텅 비었으되,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 자리. 서로를 지탱하며 한 세계를 이루는 두 숨결임을 원효는 직감하고 있었다.

 

원효는 주막 쪽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길은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서녘으로 이어져 있었다. 발밑의 흙이 부드럽게 무너지고, 그 틈으로 밤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한 걸음마다 그는 무언가를 내려놓았고, 또 다른 무언가를 다시 밟았다. 놓임과 밟음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이어졌다. 그에게 그것은 걸음이 아니라 순환이었다. 머문 자리엔 삶이 있었고, 떠나는 길엔 죽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움직임은 서로 안에 동시에 머물렀다. 결국 ‘생사의 자유로운 왕래 속에서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증득 한다’는 화엄경의 말씀을 그는 이제 보다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길가의 바람에 마른 풀잎이 흔들렸다. 그 소리가 귓가에 닿자,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닿으며, 마치 누군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듯한 가슴의 떨림을 느꼈다. “세상은 나를 한순간도 떠나있지 않았구나, 내가 마음속에서 버린 것들조차 나를 밀어 걷게 하고 있구나.” 원효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발걸음마다 흙이 조금씩 움푹 꺼지고, 그 자리에 새 그림자가 생겼다.

 

멀리 작은 강이 보였다. 그는 강가에 다다르자, 한동안 앉아서 그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물은 끊임없이 흘렀지만, 그 흐름 안에는 변하지 않는 모양이 있었다. ‘흐르는 것’과 ‘머무는 것’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부서지는 물살 속에서도, 비록 서로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마주치는 그 인연(因緣)의 심연(深淵)은 어떻게 되는지는 오직 모를 뿐(不識)이지만, 항상 그들의 길의 본래 자리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강물의 표면에 낮게 인사를 올렸다. 그 인사에 반갑게 맞장구쳐줄 그 누구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흐름을 향한 인사, 그것이었다.

 

그가 다시 강가로 걸음을 내딛자, 물가의 돌 하나가 굴러가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그의 마음속으로 번져왔다. 살아 있기에 떠날 수 있었고, 떠날 수 있었기에 다시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떠남은 더 이상 단절이 아니었다. 떠남은 곧 다른 생의 시작, 그리고 모든 생이 서로를 향해 돌아가는 길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짧게 합장하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 길 위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길은 모든 생이 지나가는 길이며, 그 자신 역시 그 흐름 속의 한 구절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조용히 흐름에 머물렀다. 발끝에 닿는 흙이 따뜻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미소는 어둠보다 먼저 밤을 밝혔고, 그 길 위에 ‘법(法)’이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산이 묵직하게 안개를 품은 새벽, 원효는 지금껏 만났던 모두를 생각하며, 그들이 어렵게 지내 온 힘들었던 길에서 남긴 조그만 틈들을 따라 스스로 가쁜 숨을 고르며 마땅히 가야할 길을 차분히 찾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조용히 화엄경 한 구절을 되뇌었다. “청정한 인천(人天)의 스승을 만약 누가 보고 들으면(若有得見聞 淸淨天人師) 모든 악취(惡趣)에서 영원히 벗어나 일체 고통을 여의게 되리로다(永出諸惡趣 捨離一切苦), 그 법은 본디 자성이 없으므로 능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니(以法無性故로無有能了知) 이와 같이 법을 이해하면 철저히 아는 바가 없으리라(如是解於法 究竟無所解).

 

천신들에게나 인간들에게나 뛰어난 스승이신, 부처님을 만약 어떤 이가 한번 보거나 한번 듣기만 해도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과 같은 온갖 나쁜 갈레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님을 보고 듣는 일인가... 부처님이란 곧 법이며 진리다. 법을 보고 진리를 본 사람이 어찌 악도에 떨어지겠는가. 또한 모든 것은 실체라고 할 것이 있어야 그것을 알 수가 있지만, 실체가 없으면 안다는 것이 없는 것이다... 모두가 법을 이와 같이 이해하여 철저히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몸이 오고 가는 것이 본래의 삼매(三昧)라네! 비로소 금강(金剛)처럼 일체 모든 의심을 깨뜨리고, 마침내 일심삼매(一心三昧)가 우주를 삼키네! 끝내 무생자유(無生自由)를 누리리라!”

 

깊은 발원을 마친 원효는 오랜 포행 길 끝에 우연히 낙산사에서 있었던 의상의 일을 소문으로 듣게 되어, 그리로 발길을 다시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