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7권 《생사자재》 - 제9장 관·세·음(觀·世·音) (1)

qhrwk 2026. 5. 15. 20:35

 

제9장 관·세·음(觀·世·音) (1)

 

“화엄의 빛은 저 헐벗고 굶주린 이들의 눈물 속에서도 빛나야 합니다.”

 

당나라에서의 길고 험난했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쉴 틈도 없이 발걸음을 동쪽으로 돌렸다. 서라벌의 화려한 환대도 그의 발을 묶어둘 수는 없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동해의 아득한 해변, 파도가 몰아치는 붉은 절벽 동굴에 머문다는 소문이 그의 구도심(求道心)을 강렬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험난한 산맥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동해의 바다는 푸르다 못해 칠흑처럼 짙었다. 성난 파도는 쉴 새 없이 기암괴석을 때리며 부서졌고, 날카로운 해풍은 승복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의상은 깎아지른 절벽 끝, 바닷물이 금방이라도 덮칠 듯한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이시여, 부디 저의 눈앞에 나투시어 이 탁한 세상의 중생들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의상은 눈을 감고 삼매에 들었다. 칠일 밤낮을 굶으며 올리는 목숨을 건 결사의 기도였다. 셋째 날, 문득 눈앞에 푸른 새(靑鳥)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새는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의상의 머리 위를 맴돌더니 해안가 굴속으로 사라졌다. “저 새가 나를 인도하는구나.” 의상은 굴속으로 자리를 옮겨 정진을 이어갔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바람이 살을 후벼 파며 에는 듯한 추위와 맹렬한 비바람 속에서, 그의 몸은 얼음처럼 식어갔으나, 그의 정신은 오히려 불처럼 타올랐다. 그의 곧은 자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관세음보살을 향한 염원만이 붉은 절벽 주위를 맴돌았다.

 

이레째 되는 날 새벽,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요동치던 검은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갈라지더니, 바다 밑바닥에서 거대한 옥빛 자태의 청룡(靑龍)과 하늘의 호법신들인 천룡팔부(天龍八部)가 솟아올랐다. 그들은 의상을 호위하며 바다를 경배했고, 하늘에서는 어디선가 파랑새 한 마리가 다시 날아와 영롱하게 빛나는 수정 염주(水晶 念珠) 한 알과 용왕이 바친 여의주(如意珠)를 의상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의상은 눈을 번쩍 뜨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이것은 징조일 뿐, 아직 보살의 진짜 모습을 뵙지 못하였도다. 내 어찌 여기서 기도를 멈출 수 있겠는가.” 그는 다시금 눈을 감고 더욱 깊은 기도에 빠져들었다. 다시 칠일의 시간이 흐르고 열넷째 밤이 되었다.

 

그때, 세상이 숨을 죽였다. 파도의 성난 포효가 멎고, 하늘과 바다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그는 두 손을 모아 염송했다.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나무 관세음보살...” 그의 소리는 풍랑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다. 마치 하늘과 바다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 점점 불꽃처럼 타올랐다. 바람은 칼날 같았고, 비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몸을 떨지 않았다. 그의 몸은 굶주림에 쇠약해졌으나, 그의 마음은 세계의 모든 고통을 품은 연꽃처럼 넓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수평선 너머로 황금빛 서기가 피어오르며, 바다 위엔 거대한 붉은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몰아치던 파도 소리가 일순간 멎으며 사방에 신비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감았던 눈을 뜨자, 수평선 너머에서 온 세상을 자비롭게 물들이는 황금빛 서기(瑞氣)가 피어올랐다. 태양보다 눈부시고, 달빛보다 은은한 그 빛의 중심에서 거대한 붉은 연꽃 한 송이가 바다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연꽃 위에, 순백의 옷을 걸친 관세음보살이 마침내 홀연히 자태를 드러냈다. 보살의 얼굴에는 세간의 모든 고통을 어루만지는 듯한 한없는 자비와 평안이 서려 있었다. 그 거룩한 모습에 의상은 환희심에 차올라 바위에 엎드려 수없이 절을 올렸다.

 

“대성(大聖)이시여, 어리석은 사문 의상이 엎드려 봬옵니다. 부디 신라의 가엾은 중생들을 굽어살피소서.” 관세음보살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의상의 귓가에 맴돌았다.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산새의 지저귐 같기도 한 청아한 음성이었다. “훌륭하도다, 의상이여. 너의 지극한 구도심(求道心)이 하늘과 바다를 감동시켰구나. 같다는 것[同]은 ‘머무르지 않는 것’이요, 머무르지 않기에, 비로소 모든 중생의 아픔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머무는 이 굴 위의 산정에 쌍죽(雙竹)이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전각을 짓고 중생의 귀의처로 삼으라.” 보살의 형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때는 인자한 노인의 모습이었다가, 찰나의 순간 고결한 여인의 형상으로 변했고, 다시금 형체 없는 빛의 흐름으로 돌아갔다. 의상은 그 경이로운 변화 속에서 자신이 평생 매달려온 화엄의 진리를 목격했다.

 

“의상아, 네가 본 수정 염주의 알들은 서로를 투명히 비추고 있지만, 결코 서로를 가로막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 하나가 있는 이 도리가 어찌 글 속에만 있겠느냐. 네가 만나는 굶주린 백성의 얼굴이 곧 나의 얼굴이며, 네가 딛고 선 이 거친 바위가 곧 정토(淨土)임을 알아라.” 보살의 형상은 서서히 흩어져 동굴벽의 붉은 이슬(落雁)로 변해 바위마다 맺혔다. 의상은 그 자리에 엎드려 통곡하듯 배례했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마침내 도달한 '무애(無礙)'의 환희였다. 그날 밤, 동굴의 절벽 위에는 달빛보다 밝은 한 수행자의 깨달음이 붉은 연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험난한 절벽이 아니다. 중생의 고통을 듣는 보살의 품이다. 의상은 붓을 들어 정진했던 동굴 이름을 ‘의상대’라 적고, 보살이 현신했던 굴을 홍련암(紅蓮庵)이라 불렀다. 붉은 연꽃처럼 피어난 자비의 마음이라는 뜻이었다.

 

홀로 남은 의상의 볼에는 뜨거운 환희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날이 밝자 의상은 보살이 일러준 대로 동굴 위의 산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놀랍게도 척박한 바위틈에서 푸른 대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솟아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의 말씀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음을 확인한 의상은 그 자리에 엎드려 다시 한번 부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터를 닦기 시작했다. 의상은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전설 속의 산, 보타낙가산(補陀洛伽山)의 이름을 따 그곳에 지은 도량의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명명했다. 거친 파도를 잠재우고 피어난 한 송이 연꽃처럼, 훗날 낙산사는 수많은 신라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영원한 자비의 등불로 동해를 밝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