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7권 《생사자재》 - 제10장 관·세·음(觀·世·音) (2) (제7권 終)

qhrwk 2026. 5. 15. 20:36

 

제10장 관·세·음(觀·世·音) (2)

 

낙산사가 세워지고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서기가 온 신라에 퍼져나가자, 그러한 소문이 바로 의상의 평생의 도반(道伴)인 원효에게도 전해졌다. “의상 스님께서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였다니 참으로 기뻐할 일이로다” 원효는 긴 포행의 길에서 곧장 짚신을 고쳐 신고 동해 낙산사를 향해 길을 나섰다. 그 역시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참모습을 뵙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 깊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낙산사가 멀지 않은 어느 넓은 들판에 이르렀을 때였다. 들판에는 소복을 입은 한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먼 길을 걸어 허기가 졌던 원효는 여인에게 다가가 농을 섞어 말을 건넸다. “저기 저... 보살님, 길 가는 나그네가 시장하여 그러니 그 벼를 조금만 베어 주실 수 있겠소?” 그러자 여인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직 벼가 익지 않아 드릴 것이 없습니다.” 원효는 멋쩍게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속으로는 ‘야박한 여인이로군.’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맑은 냇가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여인이 다리 아래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여인의 손에 들린 것은 붉은 피가 묻은 월수포(달거리 천)였다. 목이 몹시 말랐던 원효는 여인에게 다가가 정중히 청했다. “저...보살님, 목이 말라 그러니 마실 물 한 바가지만 내어주시겠소?” 여인은 말없이 바가지를 집어 들더니, 하필이면 핏물이 흐르는 냇물을 푹 떠서 원효에게 내밀었다. ‘이걸 마시라고?’ 원효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걸림이 없는 무애행(無碍行)을 실천하는 그였지만, 핏물이 섞인 물을 마실 수는 없었다. 원효는 여인이 준 물을 슬쩍 땅에 버리고는, 상류의 맑고 깨끗한 물을 자신이 직접 떠서 시원하게 들이키고 돌아선 그때였다.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더니, 사람의 말로 낭랑하게 지저귀는 것이 아닌가. “아아! 성인(聖人)을 알아보지 못하고 포기해버린 스님[罷休和尙]이로구나!” 파랑새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동시에 빨래하던 여인도 아지랑이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원효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더러움도, 깨끗함도, 모두가 공(空)이거늘 내가 순간 분별심에 사로잡혔구나. 아! 벼를 베던 여인도, 빨래를 하던 여인도, 파랑새도 모두 관세음보살의 화현(化現)이었구나!” 관세음보살은 깨끗함과 더러움, 성스러움과 속됨을 분별하는 원효의 마음속 찌꺼기를 시험했던 것이다. 진정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는 핏물 속에도 깃들어 있건만, 원효는 아직 맑은 물과 흐린 물을 나누는 분별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원효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달려 낙산사에 도착했다.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붉은 절벽 아래의 관음굴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원효가 굴 입구에 다가서자, 잔잔하던 동해 바다가 갑자기 무섭게 성을 내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집채만 한 파도가 솟구치며 관음굴 입구를 매섭게 때렸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성난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결국 원효는 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벼랑 끝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절망 대신 호탕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하하하! 의상은 정결하고 지극한 기도로 맑고 투명한 바다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했으나, 나는 분별심을 버리지 못해 진흙탕 속의 관세음보살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관세음보살은 이미 내게 두 번이나 모습을 나투셨거늘, 어리석게도 이 굴속에서만 찾으려 했단 말인가!” 원효는 바다를 향해 정중히 참회의 삼배를 올린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시간은 흐르고, 낙산의 이름은 신라 전역에 울려 퍼졌다. 백성들은 고단한 삶 속에서 ‘낙산 관세음보살’을 외우며 눈물로 기도했고, 그 기도의 물결은 바다의 조수처럼 부풀어 올랐다.

의상은 그들의 신심 속에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문득 잠결 속에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

 

‘황야 위에 서 있었다. 모래바람이 몰아치고, 발밑의 땅이 진흙으로 변해 끈적였다. 그 속에서 웃으며 걷는 한 사내가 있었다. “의상이여, 여전히 깨끗한 물에서만 부처를 찾는가? 하하하” 그 목소리는 친숙했다. 돌아보았다. 원효였다. 의상은 놀라 반가움과 경외가 섞인 미소를 지었다. “사형, 저잣거리의 번잡함 속에서도 당당하게 그 길을 걷고 계시는지요?”

 

원효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산 위의 깨달음도 좋으나, 나는 백성의 웃음 속에서 부처를 본다네. 우리 둘이 걷는 길은 다르지만, 결국 한 하늘 아래의 그림자일 뿐이지.”

그 말이 끝나자 땅의 진흙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때, 하늘에서 관세음보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상이여, 원효여, 너희 둘은 나의 두 눈이니라. 한쪽은 청정한 지혜(智慧)의 눈으로 진리를 보고, 한쪽은 자비(慈悲)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두 눈이 함께 열려야 비로소 세상이 밝아지나니.”

 

그 음성은 천둥도 아닌, 바람도 아닌, 바로 천고설법(天鼓說法)이었다. 의상은 머리를 숙였고, 원효는 하늘을 향해 합장했다.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같은 시대를 살며 화엄불교의 뼈대를 세우고 실천에 앞장섰던 두 천재 화엄성사(華嚴聖師),

원효와 의상. 낙산사 앞바다는 두 성인의 각기 다른 구도의 길을 조용히 깊이 품은 채로,

지금도 푸른 파도를 철썩이며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제7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