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제8권 《한마음》 - 제2장 이장의(二障義)

qhrwk 2026. 5. 17. 06:56

 

 

제2장 이장의(二障義)

 

그때 제자 중 하늘나라를 마음대로 왕래했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로 신이한 능력을 가졌다고 전해지는 표훈(表訓)이 질문을 하였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모든 번뇌에 속박이 되어 중병에 걸린 사람이 항상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해 조금 전 간략히 말씀하셨는데, 언젠가 스승님께서 그 원인은 사람들이 그 마음을 잘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요?” 표훈은 깨달음의 길을 향하는데 방해가 되는 번뇌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다.

 

“음... 그랬었지요, 최근에 나의 사형이신 원효 스님께서 저술하신 이장의(二障義)에 보면 번뇌의 장애와 그 극복방안에 대해 아주 자세히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우선 간단히 이야기를 하면 자기 마음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고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의상이 원효의 저술인 이장의(二障義)를 직접 언급하며 번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깨달음의 길을 향하는데 방해가 되는 문(門)을 두가지로 나누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표면에 현현되는 세계인 현료문(顯了門)과 이면에 숨어 있는 은밀문(隱密門)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현료문에서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서로 대비시키고 있고, 은밀문에서는 번뇌애(煩惱碍)와 소지애(所知碍)에 연관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번뇌장은 마음이 아상(我相)의 아집(我執)·아애(我愛)·아만(我慢)·아치(我癡)로 말미암아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미혹에 빠져 있어서, 결과적으로 그것이 의식상에 번거롭고 수고로운 성질이 되어서, 그 성질이 현재의 행동을 야기하여, 마음의 적정(寂靜)을 여의게 하므로 번뇌라 이름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아(我) 중심의 소유욕으로 세상을 주관적 환상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빚은 괴로움이 바로 번뇌장이라는 말씀이지요.” 의상이 언급하고 있는 이장의(二障義)는 원효의 독자적인 연구서로서 성불(成佛)을 방해하는 번뇌(煩惱)와 그 번뇌를 끊는 방법에 대해 쓴 책으로 원효의 불교관을 살필 수 있는 저술이다.

 

“스승님 소지장(所知障)이라 하심은 법집(法執) 등의 미혹함이 고요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성(智性)을 차단하여 현관(現觀)을 이루지 못하게 하여, 결국 경계의 본성을 덮어 버려 관조(觀照)하는 마음을 나타나지 못하게 함을 말씀하는 것인지요?”

 

“그렇습니다. 소지장은 생멸문의 다양한 존재를 인식하는 진소유성(眞所有性)이나 진여문의 통일적 존재를 일여(一如)로서 여여하게 인식하는 여소유성(如所有性)이 발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법집(法執)의 무명(無明)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상은 아집으로서의 번뇌장은 주관적 망상으로 세상을 자아 중심으로 여기려는 어리석음과 관계하고, 법집으로서의 소지장은 세상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무명이 지혜의 눈을 가리는 어리석음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번뇌장은 자아의 감정적 장애와 관련이 있고, 소지장은 자아의 지성적 장애와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의 말씀 중에 시각(始覺)의 사위(四位)에서 불각(不覺)이기도 한 범부각(凡夫覺)이 알아차리는 장애요인은 곧 번뇌장이 되는 것이고, 상사각(相似覺)이 알아차리는 장애요인이 바로 소지장이 된다는 말씀인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은밀문에서의 번뇌애(煩惱碍)와 소지애(所知碍)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이 번뇌애와 소지애는 무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방해를 의미합니다. 즉 여섯 가지 염심(染心)이 생각을 움직여 상(相)을 취하기에 이로 말미암아 적정(寂靜)에 어긋나기에 번뇌애라 부르며, 근본무명(根本無明)은 제법이 능위적으로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속지(世俗智)는 얻지 못할 바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끔 방해를 하여, 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지애(智碍)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섯 가지 염심이란 바로 아뢰야식에서 생기하는 현상인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분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 그렇다면, 현료문에서 말한 이장(二障)이라는 것은 전오식(前五識)의 번뇌장과 제6식인 의식의 소지장은 결국 무의식인 말나식의 불각(不覺)의 상(相)과 염심(染心)에 수렴된다는 말씀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예 그렇지요. 조금 더 단순화해서 다시 설명을 드리자면, 번뇌의 문(門)을 두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주지(住地)번뇌와 기(起)번뇌 입니다. 기(起)번뇌라는 것은 현료문에서 말한 이장(二障)을 말합니다. 모든 마음과 상응하는 번뇌[纏]와 수면(隨眠)은 모두 주지(住地)에 의거해서 생기하기에 기혹(起惑)이라 이름합니다. 비유를 들어 말해보면 일체의 초목과 그 종자가 모두 대지에 의존하는 것처럼 이들 번뇌도 또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주지(住地)번뇌라는 것은 총괄해서 말하면 곧 하나뿐인 무명주지(無明住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하신 바대로, 번뇌장과 소지장은 무의식적인 은밀문(隱密門)의 번뇌애(煩惱碍)에 수렴된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의상은 요별경식(了別境識)의 표상(表象)은 결국 말나식의 심상(心象)의 무의식적 편파성으로 수렴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었다.

 

“번뇌장과 소지장은 기(起)번뇌 차원에 속하는데, 탐진치(貪瞋癡) 삼독으로 오감(五感)을 동원하거나 이기적 소유의 쟁취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의하여 모든 번뇌가 쌓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감정과 감각상의 소유욕이 번뇌장을 불러일으키는 아집(我執)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지식의 욕망이 원융(圓融)한 인식에 이르지 못하고, 편협한 부분 지식에 만족하고 집착하게 되어, 오로지 그것만이 정확한 사실 인식이라고 우기는 데서 또한 법집(法執)의 망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의상은 자아 중심의 기(起)번뇌적 표피층의 이기적 집착과 편협하고 부분적인 인식의 법집은 바로 주지(住地)번뇌의 심층적, 무의식적인 심리적 아상(我相) 중심의 편파성과 늘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었다. 즉 아뢰야식의 주지(住地)번뇌의 업(業)이 아주 미세해서 경험적으로 잘 체험되지 않고 선험적인 습기의 종자 흔적에 가깝다고 하여도, 말나식의 자아업상(自我業相)의 요별경식(了別境識)과 만나는 기(起)번뇌의 경험세계(表相)에 나타나게끔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망상과 무명으로서의 삼세육추(三細六麤)는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덩어리가 아니고 바로 마음의 습기(習氣)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환상(幻相)이어서 마음의 자리바꿈으로 사라질 수 있는 꿈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바로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하는 ‘용대(用大)’의 문제이지,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와 고통과 세상의 무지(無智)가 결국 생멸계 자체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근본적인 장애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업상(業相)이 물거품처럼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환상(幻相)이기에, 번뇌의 업을 지우고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으며, 앞서 말씀드린 그러한 희망의 원력이 바로 우리의 가야할 궁극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의상은 어느 곳이든 집착과 소유의 욕망으로 인해 생기는 인간의 번뇌와 업(業)의 고통은 진정한 실체가 아닌 물거품과 같은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을 소유적 자아상(自我相)에서부터 존재론적 무아상(無我相) 즉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런 헛된 수고보다도 오히려 탐욕(貪欲)을 ‘원력(願力)’으로 전환(轉換)시키는 것을 익숙하게 하는 ‘존재론적 훈습(薰習)의 수행’을 말씀하고 있었다.

 

“결국 마음 부처의 진정한 존재 방식은 시간적으로는 삼세(三世)를 차별 없이 노닐고,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을 구별하지 않고 현신하며, 언제나 ‘여기’와 ‘지금’에 있으면서, 모든 법계를 한 찰나와 한 미진(微塵) 속에 안고 있어도 모든 만물을 여여(如如)하게 구제하는, 그러면서도 온전한 대승적 원력의 희망으로 현전(現前)하여서 두두두물의 존재의 의미를 구경(究竟)에는 모두 꽃피우도록 하며, 미래에도 더욱 더 ‘새로워지게 하는’ 바로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상은 표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무리하면서,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고 평등하게, 즉 무애(無碍)하고 원융(圓融)하게 일상의 마음을 가지도록 수행하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