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글

나는 알지 못한다

qhrwk 2022. 6. 28. 22:04

지식knowledge과 앎knowing은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이다. 

지식은 값싸고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앎은 값지고, 위험을 무릅써야 하며, 용기가 필요하다. 

지식은 시장바닥에서도 얻을 수 있다. 

지식을 팔고 사는 공간, 즉 대학이라는 특별한 시장이 있다. 앎은 자기 내면이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

앎은 진정한 능력이지만, 지식은 기억력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기억력은 컴퓨터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마음의 기능이다. 

지식은 언제나 남에게서 빌린 것이다. 

그것은 영혼으로부터 성장하는 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인공적인 산물이다.

 지식은 뿌리가 없어서 성장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은 시체들의 더미일 뿐이다. 앎은 지속적인 성장이며, 살아있는 과정이다.

 즉, 앎은 그대의 의식과 그것의 진화에 속한 것이고, 지식은 그대의 마음과 그것의 기억장치에 속한다.

그 두 단어는 세상에 너무나 많은 혼란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유사해 보인다. 

지식은 값싼 것이어서, 책이나 랍비나 푼디트나 주교의 말에서 얻을 수 있다.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더미일 뿐이고, 스스로의 생명력이 없다. 

지식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그것은 무지함에 아무런 차이를 주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하라. 

본래의 무지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유일한 차이라면 지식이 무지함을 가려준다는 것이다. 

자신이 더 이상 무지하지 않다며 세상을 속일 수 있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암흑만 존재할 뿐이다. 

남에게서 빌려온 단어들 뒤에는 자신의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앎은 무지함을 몰아낸다.

그것은 어둠을 몰아내는 빛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學者와 현자賢者의 차이점을 기억하라.

현자는 반드시 학자가 아닐 수도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학자는 반드시 현자가 아닐 수도 있다.

학자가 현자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학자는 너무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서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다.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기만에 거꾸로 기만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현자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현자임에 분명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토록 어리석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믿기 시작한다. 

따라서 학자의 삶에는 어떤 여행이나 탐험이나 발견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앎의 인간은 지식을 버리기 시작한다. 

그에게 지식은 장애물이고, 가짜의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를 실현할 수 있기 전에 가짜를 제거해야 한다. 

지식을 아는 것보다 차라리 무지한 것이 더 낫다. 

무지함은 적어도 그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버리는 것은 재산을 포기하고, 왕국을 포기하고, 가족을 포기하고, 사회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그대의 마음속에 축적된다. 

그대가 어디를 가더라도,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을 가더라도 지식은 언제나 그대 안에 남는다.

지식을 포기한다는 것은 깊은 내면을 정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명상’의 의미이다. 

명상은 빌려온 지식을 버리고 자신의 무지함을 완전히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변형을 가져온다.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순간, 무지함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나큰 변화를 겪는다. 

무지함은 크나큰 변화를 통해 순진무구함으로 바뀐다. 

그래서 현자는 늘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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