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판 같은 것♣
법정 스님은 효봉 스님의 거처인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하루에 나누 두짐씩을 해다가 아궁이마다 군불을 지피는
소임을 보면서 늘 배가 고팠던 행자시절을 보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시인, 전 조계정 전국신도화장 박완일 법사 등이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주변은 항상 시끄러웠다.
스승 효봉 스님이 주역이기도 한 교단정화운동이 한국불교계로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 말마다나 '풋중'에 불과 했던 법정 스님은 1956년 여름안거가 끝난 7월 보름 해잿날에 계를 받고 중이 되었다.
그 이튿날 효봉 스님을 따라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옮겨 갔다.
여시서 1년 남짓 착실하고 빈틈없고 엄격하고 아주 조심스러워던 '풋중 시절'을 보냈다.
법정 스님은 이 시절을 두고두고 감사했다.
무슨 일이나 처음 먹은 마음과 시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소 겪어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정은 아주 오랜 후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이야기 했다.
"그때 어럿 속에 섞여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그럭저럭 지냈다면 어떻게 됬을까,
돌이켜 보면 아찔해진다.
출가 수행의 길에는 눈 밝은 스승과 어진 도반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배우고 익힌대로 풀리기 때문이다."
법정은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법정은 해인사 시절 아침 저녁으로 장경각에서 따로 예불을 드리면서 '나 자신을 응시하는 일'에 힘을 기울렸다.
그런 해인사 시절 법정의 의식 형성에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그때 선실의 조실 스님으로 금봉 스님이 있었는데 함께 조실방에 들어간 도반과 선사의 문답을 듣다가
법정의 귀가 뜨인 것이다.
법정의 도반이 조실 스님께 여쭈었다.
"저는 본래면목 화두를 하는데 의문이 가시지 않아 공부가 잘 되지 않습니다."
본래면목이란 부모에게서 낳기 이전 본래의 내 모습은 무엇이냐는 의문을 말한다.
화두는 참선할 때 끝없이 추구하는 명제다.
이 말을 들은 금봉 스님이 즉석에서 다구쳤다.
"본래면목은 그만 두고 지금 당장의 그대 면목은 어떤 것인가?"
법정은 섬광처럼 번뜩이는 전율과 감흥을 느꼈다.
법정은 그 문답을 듣고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이때부터 좌선하는 일에 재미가 나서 무료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면목을 알아 가는 일에잔잔한 기쁨으로 맑은 정신을 지닐 수 있었다.
다른 한가지 일도 우연히 찾아왔다.
어느랄 법정은 법당 둘래를 거닐고 있는데 시골에서 올라 온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장경각에서 내려오면서
법정을 보더니 불쑥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스님 팔만대장경이란 것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법정이 대답했다.
"방금 보고 내려오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 빨래판 같은 것이 팔만대장경입니까?"
아주머니의 물음에 법정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빨래판 같은 것'라는 말이 그의 가슴에 화살처럼 꽂혔던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한낱 빨래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법정은 이때 받은 충격으로 그해 여름 안거를 마치고 강원으로 내려가 경전을 배우고 익혔다.
국보요 ,법보라고 해서 귀하게 여기는 대장경판이지만, 그 뜻이 일반에게 전달 되지 않을 때는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법정을다구쳤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것인가'
풋중이었던 법정에게 만만치 않은 과제가 안겨졌다.

해인사 장경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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