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에게 보내는 편지♣
법정은 1965년 5월 「어린 왕자」를 만났다.
그는 생텍쥐베리의「어린 왕자」를 만나비로서 인간관계의 바탕을 인식 할 수 있었고 세계와 자신의 촌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사물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법정 스님은1971년에 출간한 「영혼의 모음」의<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어린 왕자에게
고백을 한다.
"....지금까지 읽은 책도 적지 않지만, 너에게서처럼 커다란 감동을 받은 책은 많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나한데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의 경전이라 한대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누가 나 더러 지묵으로 된 한두권의 책을 선택하라면 '화엄경'과 함께 너를 고르겠다....
그러니까 너는 사람의 폭을 재는 한 개의 자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그리고 네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누워서 들어,
그래야 네 목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야.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날아다닐 수 있는거야.
내 목소리는 들을수록 새롭기만해. 그건 영원한 영혼의 모음이야."
법정은 스님이었지만 열린 마음이 가득한 불자였다.
법정이 수십년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결국 떠난 지금이야 불교경전이 아닌 다른 책을 읽는 스님의 모습이
전혀 낮설지 않지만, 그의 첫 작품인 「영혼의 모음」의 타이틀이기도 했던<어린완자에게 보내는편지>라는 글을
보면 당시 세상에 법정이란 인물이 어떻게 비춰졌을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봉은사 다래헌 시절을 겪기 이전 법정 스님은 이미 어린왕자를 만났다고 고백했다.
그런 그가 사바세계에 내려온 이후 한 일은 한국불교의 현대화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종교 인사와 지식인과 끊임없이 교류했다.사람들에게 그런 그의 모습은 실제 '참여하고 괴로워 하며
비판하고 사랑하는'불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어린왕자와 교감하며 불교 이외의 것에도 진리와 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법정의 세상을 보는
시야가 전전 넓어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법정은 이 무렵부터 한국불교 이외의 한국사회의 한계를 느끼면서 발언 수위를 점차 높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창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들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은보지 못하고,그 집의
가격만을 따지는 그 시대의 어른들에게 역정이 나기 시작했던것일까.
법정은1970년6월 월남파병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6월이 장미의 계절일수 만은 없다.
아직도 깊은 상흔이 아물지 않고 있는 우리에게는,카인의 후예들이 미쳐서 날뛰던 6월, 언어와 풍습과 핏줄이 같은
겨레끼리 총부리를겨누고 피를 흘리는 악의 계절에도 꽃은 피는가.못다핀 채 뚝뚝 져버린 젊음들이, 그 젊은 넋들이,
잠들어 있는 강 건너 동작동, 거기 가 보면 전쟁이 무엇인지뼈가 사무치도록 알게 될 것이다.
그것도 남이 아닌 동족끼리의 상잔, 주의나 사상을 따지기에 앞서 겨레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국회의사당과 행정부처가 때로는 국립묘지로 이동해왔으면 하는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국가 대사를 요리하는 선량이나 고급관리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실감케 하고 나아사가 생과사의 관념적인
거리를 단축 시켜 주기 위해서.....
몇 해 전 의사당 안의 풍경 한조각,바깥 사움터로 군대를 보내냐 는냐 마느냐 하는가장 엄숙한 결단의 마당에서 민의를
대변 한다는어떤 '손'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던란다. 아무리 자기 자신은 싸움터에 나가지 않는다기로 이렇듯 소홀한 생명 관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법정은 1971년 함석현,장준하,선생 등의 주도 아래 4월 19일 결성된 민주수호국민 협의회에 참여했다.
김재준, 조향록 목사 안병무 등의 신학자와 함께였다.불교계 인사로는 유일한 인사였던 법정은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걸핏하면 연행되는'시절을 보내게 된다.
"세월이 나를 못 가게 합니다. 요즘 거의 연금 상태입니다.4~5인의 사복이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지성인의 바로미터라고 불리웠던'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만난 지인 인현 서울대 미학과 명예교수인
김문환씨에게 보맨 짧은 편지의 내용이다.
편지에 적혀 있는 날짜는 1974년1월11일.
법정은 후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기도 했다
."봉은사 다래헌 시절 어용화 된 불교종단에서는 이런 나를 마치 무슨 보균자처럼 취급하였다.
기관원이 절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감시하고 걸핏하면 연행해 괴롭혔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군사독재의 당사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니 마음이 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외부와의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무렵 법정의 각오가 어떠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당시 종교계인사들의 시국 모임이 열렸던 어느 날 다른 종교의 한 교수가 말했다.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인과 한 자리에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법정은 자신의 승복을 가리키며 응수했다.
"이웃이 민주화를 논의 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이 옷을 벗고 참여하겠습니다."
법정의 현실 참여는1974년12월27일 있었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성명 발표회에서 최고조로 치닫는다.
이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서울 을지로 1가 대성빌딩에서 1천여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해
광고 무더기 해약 사태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광고 무더기 해약 사태는 박정희 정권이 삼선개헌과 유신헌법으로 사실상 종신정부를 꾸린 3공화국에 비판을 멈추지 않는 언론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였다.
법정은 함석현 씨 등의 강연후<개혁 운동의 단초>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집권자와 주변의 몇몇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스스로의 생존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유신체제의 폐지를 원하며 그 근본 규범이 되고 있는 현행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는 길밖에 없음을 자각,
실천운동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강연회가 끝날 무렵 이른바'인혁당 사건' 피고인 전창일 씨의 부인 황현승씨의 부인 안보형 씨 등이 등단하여 말하였다.
"인혁당은10년전에도 오늘에도 없는 것이며, 조작 된 사건으로 공개재판을 주장한 조지 오글 목사의 추방은 부당
합니다. 공개 재판을 받게 해 주십시요."
이 날 강연회는기동경찰관 200여명이 출입구를 차단 통재하는 등 상당히 삼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당시 법정 스님은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는 문필가이자 반체제 인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현실참여 종교인으로 그의 여정이 일순간 문을 닫는 사건이 있었으니,1974년 1975년에 걸쳐 일어났던 인혁당,
혹은 인민혁명당으로 불리는 사건이었다.
1974년 4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으로 23명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전격 구속 되었다.
구속된 23명중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흥선,등 8명은 사형을 선고 받았고,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15년까지 중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진지 불과 18시간 만인 1975년 4월9일 형이 집행 되었다.
이는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해외에도 알려져, 제네바 국제법학자협회가1975년 4월9일을' 사법사상암흑의 날'로
선포 하였다.
이 무시무시한 사건 앞에서 법정 스님은 무력감을 느꼈다.
"75년이던가 이른바 인혁당 사건으로 한 무리의 반정부 새력이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었다.
반체제 쪽에서 정치적인 조작극이라고 몰아 붙이자 군사독재자들은 사형을 언도한 바로 그 다음 날 8명 전원를
사형집행하고 말았다.
사법사상 일찍이 그 유례가 없었던 이런 만행앞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죄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거나 다름이 없다고 나는 자책했다.
칼 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재빨리 사형을 집행하고
만 것이다."
법정은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한 이와 같은 반체재 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명색이 출가 수행자로서 마음에 적개심과 증오를 품는다는 일 또한 자책이 되었다.
무슨 운동이든 개인의 인격형성의 길과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내가 무엇 때문에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지 되돌아 보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그릇과 삶의 몫이 무엇인지 다시 헤아리게 되었다.
법정은 결국 걸망을 짊어지고 산으로 떠났다.
당시 산으로 떠나는 법정 스님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스스로 죄인이라는 자책만이 남아 있었을까.
그는 이후 송광사 불일암에 들어가 17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어린 완자를 사랑하고 타종교인과 소통했던 30~40대 법정은 그 시간 내내
가두어 두지는 않았다.
그는1991년에 발표한 자전에세이 『나의 길』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소방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하자만 일단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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