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암에서♣
"사형,저 대신 내일 제 속가에 다녀와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린 사제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 막 출가의 티를 벗은 젊은 스님 법정은 산에서 해온 땔감용 나무를 부리며 말했다.
" 예, 다름이 아니라 소문을 듣자하니 저의 집에....."
법정은 그 길로 큰 스님께 하락을 받고 지리산 쌍계사를 내려왔다.
화계장터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 ,사제의 속가에 도착한 법정은 잠시 망연히 서 있었다.
사제의 집에 사제의 속가 가족은 없었고 그저 멀리 떠나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법정은 사제의 가족을 더 찾아봐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만 출가 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로서는 속세에 오랜시간 머무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더구나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 굳이 사제의 가족을 찾아낸다 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길에 서서 한참을 망서려서 일까,다시 화개장터로 돌아와 보니 칠흑 같은 밤이었다.
별빛도 달빛도 없이 아무도 없는 거리엔 겨울비마저 내리고 있었다.
화개장터에서 화개사까지는 15리 길,동구에서 절까지는 다리를 건너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 숲길이었다.
법정은 눈앞이 캄캄했다.
때는 1950년대 말 깊은 산골짜기에 전기가 들어 왔을리 만무했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풋중 법정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뚜벅뚜벅 어두운 밤길을 걸어갔다.
달빛조차 없는 산길, 처음에는 씩씩하게 걸었지만 자꾸만 머리끝이 오싹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법정은 절로
'관세음보살'을 외며내닫듯 뛰었다.
절에 닿으니 진땀으로 속옷이 촉촉히 젖어 있었다. 법정은 길게 한순을 토해냈다.
1975년 가을,송광사에서 불일암으로 오르는 도중 법정은 풋중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 올라 허허 웃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산길을 오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무서움은 온데간데없이 그의 곁을 떠나고 없었다. 법정은 자신이 격은 경험을 거쳐서 새로운
눈이 열리고, 실수를 통해서 배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법정은 집터만 남아 있는 허허로운 불일암을 보며 암자를 새로 짓기로 마음 먹었다.
법정은 대장경 한글판을 만들던 시절에 마음에 새겼던 글귀를 되뇌었다.
"과거를 따르지 말라.미래를 바라지 말라.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미 버려진것,그리고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당면한 현재의 일들을 자신의 처지에서 잘 살펴 흔들림 없이 바르게 판단하라. 그리고 경지를 더욱 넓히라. 다만 ,
오늘 해야 할 일에 전력을 기울리라. 누가 내일에 죽음이 있을지 알 수 있는가...."
<대장경'일야현자경'>
법정이라는 이름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 올리는 『무소유』는 이듬해 출간됐지만 정작 법정이 난을 선물 받아
몇년간을 애지중지 키우다가 다른 이에게 선물하며 집착을 버림과 동시에 무소유의 의미를 비로서 알았다고
글로 고백한 것은1971년이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법정의 '무소유' 정신은 그가 속세를 떠나 불일암에 들어서기이전에 이미 완성된 것이었다.
1976년 4월에 출간된 『무소유』는 출판사 집계로지금까지 370만 부나 팔린 스님의 대표작이다.
화장지를 절반으로 잘라서 쓰고 종이 한장도 허트루 버리지 않았던 스님의 삶이 책에 그대로 담겼다.
원고지에 써내려간 지 40년이 흐른 글이지만 법정의 『무소유』는 아직도 살아서 펄쩍펄쩍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오죽했으면 김수환 추기경이
"이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 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는 추천사를 썼을까.
법정 자신은 불일암에 들어갔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남겼다.
" 이대로 시국 비판이나 하며 글재주만 부리고 있다가는 옳게 중노릇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재건해 수행에 정진하며 자연과의 대화와 독서로 심신을 추슬렀다. 서울에서 원고를 정리해 넘긴 첫 산문집
『무소유』를 받아 본 것도 이곳이었다."
법정은 불일암에 머물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글을 썼고 남겼다.
이후 『서 있는 사람들』『물소리 바람소리』『산방한담』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텅빈 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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