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하여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지칭되었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
그 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하였고,
1090년(선종 7)에는 구산사(龜山寺)의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중수하였으며,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불당을 중수하였다.
1422년(세종 4)에 왕이 7종을 통합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할 때는 선종에 속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를 얻어 일신, 중건하였다.
1941년에 도공(道空)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비구니 도명(道明)이 중창하여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약사전(藥師殿)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그 뒤를 이어 비구니 상륜(相侖)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현재는 산신각(山神閣)·향로각(香爐閣)·동정각(動靜閣)·범종각(梵鐘閣)·대방(大房)·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좁고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알맞게 배열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창건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가 수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성월(城月)이 이절에서 배출되어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의 직책을 맡아
쇠잔하던 불교를 크게 진작하는 등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찰이다.
또한 예로부터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유물로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상이 있으며,
서북방 100m 지점에는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부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과 약사전에 모신 약사여래의 영험,
그리고 약수의 효험 등은 이 절을 기도처로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절의 뒤편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솥을 아홉 번 바꿔 걸다 - 구정선사(九鼎禪師) 이야기
동대 관음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조그마한 토굴이 하나 있다
이 곳이 바로 유명한 구정선사가 출가하여 공부하던 곳이다
구정선사(九鼎禪師) 는 무엇보다도 출가 수행자에게 하심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일화로 특히 유명한 분이다
옛날 비단 장사를 하며 살던 한 청년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한 노스님이 길가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청년이 "스님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니, 노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내 몸의 피를 빨아먹는 이들의 공양시간이라,피를 잘 빨아먹으라고 가만히 있지" 하였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 노스님은 갈 길을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스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은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노스님을 따라 출가하게 되었다
행자생활을 하던 때였다.
하루는 노스님이 솥을 새로 걸어야겠다며행자에게 그 일을 맡겼다
정성스럽게 솥을 건 행자가 "솥을 다 걸었습니다" 하자,
노스님은 "이 곳이 삐뚤어졌으니 새로 걸어라"하고는 그냥 들어가 버렸다
스스로 판단하기에는조금도 틀어진 곳이 없건만 행자는 다시 솥을 걸었다
그렇게 솥을 걸고 허물기를 무려 아홉 번 하고 나서
마침내 노스님에게서 "바로 걸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행자는 솥을 아홉번 걸었다 하여구정(九鼎)이라는 법명을 받아 큰 도를 이루었다
그 때의 노스님은 통일신라의 선지식 무염(無染)스님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늘 낮추는 겸허한 마음이야 말로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의 참된 모습이기에
구정선사의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두고 수행자 사이에서 회자되는 참된 법문이다
*정-鼎(솥정)
【 육조 혜능스님 이야기 - 방앗간의 노행자】
혜능스님께서는 당 태종(太宗) 정관 12년 중국 최남부 지방에서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노씨이며 3세 때 아버지를 잃고소년시절부터 나무 장사를 하여 늙은 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했다.
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지만 그 마음은 진실하였다.
어느 날 시장으로 나무를 팔러 가다가 탁발승의 독경하는 소리에깊은 관심을 가지고 듣던 중
「응당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구절에 홀연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독경한 스님에게 무슨 경이냐고 물으니 금강경 (金剛經)이라하여
젊은이는 금강경 배우기를 간청하며 자기가 조금 전 듣고느낀 바의 심경을 이야기 하니 탁발승은
황매산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가라고 소개해 주었다.
젊은이의 발심을 기특하게 생각한 탁발승은 금 열냥을 주면서
노모의 옷과 양식에 충당하여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젊은이는 어머니를 편히 모신 뒤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를 찾아가 뵈옵고 예배하니
「네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라고 묻자
영남 신주에서 오직 깨달음의 법을 구하러 왔다 하니영남인은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이에 젊은이는
「사람은 남쪽 북쪽이 있지만 불성(佛性)에야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홍인대사는 이 몇 마디 말로 비범한 큰 그릇인 줄 알았지만다른 학인들의 눈치를 염려하여
큰 소리로 꾸짖듯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하라고 몰아내었다.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는 방앗간을 둘러보시게 되었다.
힘이 부족하여 돌을 등에 지고 열심히 방아를 찧는 노행자를 보시고 소견이 쓸만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혹 나쁜 사람이 너를 해칠까 염려하여더 말하지 않은 것인데 네가 그 뜻을 알았느냐?] 라는 질문에
「예, 저도 스님의 뜻을 짐작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느 날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는 문하대중을 모아 놓고 일대의 놀라운 포고를 했다.
「대중은 들으라. 세인(世人)들의 생사가 큰일인데너희들은 복이나 구하고 있지, 태어나고 죽는 괴로움을
벗어나는 진리는 구하지 않는구나.
너희들은 스스로 지혜를 보아서 본심의 지혜로운 마음을 게송으로표현하여 나에게 가져 오라.
만일 진리를 깨달았다면그대에게 초조 달마대사 이래의 가사(복전의, 예복, 수행자의 옷)와
발우(스님들이 공양 시 사용하는 밥그릇),그리고 법(진리)을 전하여 육대조사를 삼겠노라」 하였다.
그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오조의 법을 이어받아육조가 될 자라고 지목을 받고 있던 신수대사(神秀大師)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대중들이 다니는 복도 벽 위에다이름을 밝히지 않고 붙였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오조 홍인대사는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게송임을 아셨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이 게송을 따라 수행하라고 했다.
노행자는 여전히 방아만 찧다가 어느 사마승이 외우는신수대사의 게송올 듣고 아직 깨달음의
진의(眞意)는 증득하지못했음을 평가하고 그날 밤 글을 잘 모르는 노행자는
동자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부르는 게송을 신수의 게송 옆에 써 달라고 했다.
菩提는 本無樹요 明鏡은 亦無臺라
佛性은 常淸淨커니 何處有塵埃리오
지혜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노행자의 게송을 본 대중은 놀라며 의아해 하였다.
그리고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육신 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수군거렸다.
조사께서는 노행자의 게송을 보시고 다음날 방앗간에 가셔서허리에 돌을 달고 방아를 찧는 노행자에게
「쌀을 얼마나 찧었느냐?」고 물으시니 이에 노행자는
「쌀은 찧은지 오래되었사오나 키질을 아직 못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주장자로 방아를 3번 내려치고 돌아 가셨다.
그 뜻을 알고 삼경에 찾아가니 「
네가 이제 제 6대조가 되었다.잘 두호하고 지키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는 부촉을 하셨다.
노행자는 무명의 나무장사로서 출가한 지 8개월 만에동토 초조 달마대사의 정법상승인의 의발과 법을
오조 홍인대사에게 전수받아 육조 혜능대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