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대왕과 승가사
고려, 조선시대 때 승가사는 왕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므로
여러 임금들이 이곳에 행차했던 기록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세종은 승가사를 왕실의 기도처로 삼았었던 듯,
여러 차례 신하를 이곳으로 보내곤 했다 《조선왕조실록》 권16 세종4년 5월 경오(庚午)조와
8월 임진(壬辰)조에 보면, “우의정 정곡을 흥천사(興天寺)에 보내고
곡산 부원군 연사종을 승가사에 보내어 약사불에게 정성을 다해 재를 올리도록 하였다”
“평양군 조대림을 진관사(津寬寺)에 보내고 찬성사 맹사성(孟思誠)을 승가사에 보내어
재를 올리며 부처님께 빌도록 했다”는 등의 기사가 보인다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와 신병을 고치고자 흥천사·진관사·승가사에 신하를 보내어
불공을 드리게 했던 것인데, 영험이 있어 병이 낫자 그 보은으로 절을 중수케 했다.
이때부터 승가굴이 치병에 효능이 크다 하여 약사전(藥師殿)으로 전각의 이름이 바뀌었다.
세종의 승가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책 세종 6년 4월 경술(庚戌)조에 보면 예조(禮曹)에서 전국의 사찰을 36개만을 남기고
통폐합하자는 계획을 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승가사가 갖고 있던 전지(田地) 60결에
다시 90결을 더 주자는 건의가 나와 세종의 허락을 얻은 기록이 있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이곳에 불공을 드려 병이 나았으므로 승가사에 특별한 관심을 지녔던 모양이다.
한편, 그 빼어난 경치 때문에 승가사는 내외인들에게 두루 유명한 곳이었던 듯
여러 문인들의 탐방기록이 남아 있다. 심지어
“명나라 사신 만세덕(萬世德)이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와 승가사에가 부처님에게
고개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술을 마시고는 은전(銀錢)을 절의
스님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해가 저물어서야 숙소로 돌아갔다”
(《조선왕조실록》권123 선조 33년 3월 임술조)라는
외국사신의 비공식 탐방기록이 있다. 또 순조 때의 문인 윤치영(尹致英)의
《석오집(石梧集)》에도 〈유승가사기(遊僧伽寺記)〉라는 승가사 순례의 글이 있다.
약사전은 자연동굴인데 안에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승가대사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