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과 공경이 세상을 밝힌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요 신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요 신이다.
[자료출처 : 목탁소리(www.moktaksori.org) 원문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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