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한시 감상

偶 吟 [우 음] 우연히 읊다 - 奇大升[기대승]

qhrwk 2024. 11. 14. 08:20

※ 청말근대 화가 반진용(潘振鏞)의 <유완채약도(劉阮採藥圖)>

 - 偶 吟 [우 음] 우연히 읊다 - 奇大升[기대승]

春到山中亦已遲
춘도산중역이지
산 속이라 봄빛 찾아옴도 또한 더디었거니 

桃花初落蕨芽肥
도화초락궐아비
복사꽃 막 질 제야 고사리가 살찌네.

破鐺煮酒仍孤酌
파쟁자주잉고작
깨진 솥에다 술을 데워 혼자 마시고

醉後松根無是非
취후송근무시비
소나무 밑에 취해 누우니 시비가 없네.

우리의 눈빛을 끄는 이 시의 1구를 보노라면, 봄에게도 걸음걸이가 있는가 봅니다.
산 속을 오르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금방 올라가기가 싶진 않았겠지요.
그래서 시인이 머물고 있는 깊은 산 속에는 다소 늦게 도착했나 봅니다.
봄빛 머금은 화사한 복숭아꽃 질 제야, 고사리가 살쪄갑니다.
그래서 이 시의 속살 속을 들여다보면, 깊다라는 글자[深]을 쓰지 않았어도
깊은 곳임을..., 봄도 한 번 방문하기가 쉽지 않은 곳임을 알겠습니다.
늦게 도착한 귀한 봄이라 투정도 해볼 듯하나, 늦게 와서는 또 쉬 가버리는 봄인지라,
그 짧은 봄빛을 아니 즐길 수가 없습니다.

깨어진 솥에다 술을 데워서 혼자 마시고는 얼근히 취해서는 소나무 그늘 아래 기대어
세상의 시비를 잊어버립니다. 놓아버린 그 시비들은 어디로 흘러 흘러갔을까요.
아마도 그의 취향(醉鄕) 속에는 흘러가 버린 아련한 시비대신 흙 내음 도른거리는 

소나무 뿌리의 투박한 질감과 함께 은은한 솔 향기가 번졌을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깨진 솥에서 데운 그 술에는 산 속의 풋풋한 질감을 더 많이 머금고 있지
않았을런지요. 봄빛도 늦게 왔고, 솥도 깨어진 것이고 술도 혼자 마시는데,
시의 흥취와 속내가 가난하지 않고 왜이리 넉넉하고 정겹기만 한지요.
머금은 정에 따라, 글자들은 때때로 딱딱해지기도 하고 부드러워지기도 하는데,
이 시의 글자들은 제게 순박하면서도 보드랍게 느껴집니다.
"선반 위의 술잔은 부드럽구요, 우리 님의 손목은 보드라워요."
`부드럽다/보드랍다`의 차이를 알게 해준 제 맘에 잊혀지지 않는 민요 한 구절입니다.

복숭아 꽃빛 날리고 고사리 향기 피어오는 부드러운 봄의 술잔에 님의 손목 같은
보드라운 솔 그늘의 취기 속에서 마음을 흐뭇이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생각만 하여도 그 마음의 편안함이 얼마나 깊고 은근한 것이지 알 것 같습니다.
제 지친 마음을 이 한 편의 작은 시가 어찌 이리도 맑게 깨어주다니…, 아아 이 시는 정녕,
글자로 데운 작은 술이요, 그 술로 시비를 놓고 나를 놓고, 깨어진 솥과 소나무 뿌리의
질박한 감촉에 기대게 하는 훈훈한 영혼의 선반이 아닐런지요.
이 선반 위에서 그 보드라운 봄의 술을 얻어 마시며 시인이 기대었던 소나무 뿌리로
시 속 봄빛을 데리고 가, 가만히 세상과 시의 마음을 놓아 보고 싶어집니다.